이번 밴쿠버 나들이에 만난 분이 작은 책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제목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고 부제목이 ‘특별한 고난에 특별한 은혜가 따른다.’로 돼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100년 전에 조선을 일본군대가 점령했다. 일본말을 하기 싫어하던 사람들 중에 북 조선에 살고 있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맏아들인 아버지와 동생 세명과 두만강 건너 러시아로 건너갔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기거했다. 1937년 러시아가 소련으로 불리우게 되었을 때 일본과 소련의 전쟁중 일본군들이 조선의 남자들을 스파이로 세워 소련의 정황을 살피게 했다.

고려인 혹은 고려사람이란?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즉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의 독립 국가 연합 전체(15개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1937년 스탈린 정부에 의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부터 카자흐스탄 및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탈린 정부의 공식입장은 한인들에 의한 “일본 간첩행위 침투 차단”이었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500만명을 체포하고 그중 40-50만명을 숙청 처형하고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나의 부모님과 고려인들은 1937년 겨울, 메마른 대륙의 잔인한 추위속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여 시베리아 가축용 화물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의 몇몇 국가로 이동하게 된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한번에 더 많은 사람들을 싣기 위해 화물칸을 이어놓은 기차에 고려인들을 태웠다. 부모님과 고려인들은 이 좁디좁은 화물칸에서 한 달여 동안 생활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들어왔다.

한 달 동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삶의 행위들이 달리는 기차의 화물칸에서 이뤄졌다. 마치 짐승을 실어 나르는 듯한 화물칸에서 기나긴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추위와 배고픔으로 몰아 넣었다. 갑자기 기차가 뒤집혀지는 바람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가축용 화물칸에 실려 영하의 추위와 싸우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 속에서 낮에는 하염없이 달리던 기차가 캄캄한 밤이되면 멈춰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시베리아 한 복판에 버리고 다시 달렸다. 스탈린은 한인 지식인 2,500여명을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메마른 땅 풀 한포기도 자라기 어려운 땅, 그 끝없는 대지 위 칠흑 속에 선 고려인들은 지구 밖 어두운 공간에 내팽겨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또 강제이주를 단행할 때 신분증명서류와 간단한 소지품만 지니게 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을 다 두고 와야 했고, 이 때문에 정착 초기에는 맨땅에 해딩일 수 밖에 없었다. 24시간 만에 최소한의 짐만 꾸리고 기차로 한 달을 내달린 끝에 얼어붙은 허허벌판에 던져진 고려인들… 이들의 강제 이주는 홀로코스트에 못지 않았다.

이렇게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근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렇게 옮겨진 고려인들은 혹독한 중앙아시아의 자연환경과 싸워야했다. 토굴을 짓고 추위와 배고품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던 나의 부모님과 고려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생활은 너무 풍족하고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고려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끌려가서 총받이로 죽고 기찻길, 도로 길을 닦는 인부로 끌려가 죽어갔다. 또한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하지 못하니 중요한 일을 할수가 없었다. 거의 모두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7살이 되는 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쓰고 밖에서는 카자흐스탄 말을 사용했다. 나는 학교에서 죽기살기로 러시아말을 배웠다. 7년의 학교를 마치고 15살에 기술 학교에 들어갔다. 19살까지 전기공으로 일 하며 공부했다. 다시 나는 대학을 타지키스탄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너무 가난하여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전액 장학금을 주고 조그마한 생활비까지 주는 타지키스탄 대학에 지원하게 됐다.

나는 23살이 되던 해 타지키스탄 법과 대학에 합격되었다. 그때 기분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너무 행복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모든 어려움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기쁨도 잠시 고려인이라서 합격 시켜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되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공부 하고 싶다며 사정했더니 관계자가 감명을 받아 일년 후에 입학 시켜 주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나는 학교에서 화장실 청소와 교실정돈 그리고 잔심부름을 해주며 기다렸더니 1년 후 입학허가를 내주어서 공부하게 되었다.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교수님은 언제나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국가장학금도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받을 수 없게되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밤에는 권투코치를 하며 돈을 벌었고 딱한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도와주어서 4년 과정을 잘 마칠 수 있게됐다.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준 친구들을 생각하면 목숨 같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법대를 다니는 동안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고 어떻게 해서라도 교수들에게 인정 받아야 했고 졸업을 해서 검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어떻게 흘러 가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졸업 후 나는 경찰조사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실은 고려인은 이런 직함도 받을 수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런 편견을 뚫고 경찰이 되어 조사관으로 8년 근무하였다. 열심히 근무하여 여러번의 승진을 거쳐 별 4개의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게 됐다. 거기서 흉악범 5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팔자에도 없는 강력게 형사로 활동하면서 흉악범들과 총격전을 하면서 총에 맞아 죽을 고비도 있었고 강도를 검거하다 칼에 맞아 죽을 뻔도 했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험한 경찰 공무원 생활을 한 것 같다. 이런 열심 때문에 나라에서 훈장을 받았다. 아버지는 내게 뇌물을 절대 받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뇌물 받다가 패가망신 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는 타지스탄에서 5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다. 2001년부터 캐나다 오기 전까지 변호사로 활동할 때 높은 직위에 있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동차 한 대를 살 만큼의 돈을 주면서 부탁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지만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니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의 어머니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강물에 가서 빠져 자살하고 말았다. 그 불행한 사건을 통해 나는 지금도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한다.

대학에서 만난 나의 아내는 46세에 백혈병인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두가지 사건은 말 할 수 없이 나를 절망으로 빠뜨려 놓았다.

나의 자녀들은 모두들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아들은 손자와 함께 뉴욕 가라데 대회에 참석하여 동메달을 땄다. 많은 우여곡절 속에 캐나다 토론도에 와서 망명 신청을 하여 어려운 심사과정을 거쳐 토론토에서 잘 정착하여 살고 있다.

큰 손자는 캐나다 유도 대표 선수로 여섯번의 챔피온을 했다. 둘째 손자도 유도 선수로 한번의 챔피온을 했다. 인생에 고난을 동반자라고 한다면 손자들은 인생에 꽃인 듯 하다. 참으로 사랑 스러운 열매로 알고 있다.

딸은 타지키스탄에서 농구 선수 생활을 했다. 체육 대학을 마치고 캐나다 대회에 왔다가 망명신청을 했고 망명이 받아들여져 캐나다에 정착하여 결혼도 하고 잘 지내고 있다. 막내 아들 역시 가라테 선수로서 캐나다 국제 대회에 참석하여 망명 신청을 하여 지금 밴쿠버에서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자녀들이 다 캐나다로 이민 가 버리고 나 혼자 살게되니 나의 마음은 참으로 외롭고 우울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자녀들이 알고 부모 초청으로 이민 신청을 하여 나도 지금 밴쿠버에서 살고 있다.

자식들의 중매로 지금 함께 살고있는 아내 양권사를 만난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다. 10년동안 내게 수입이 없는동안 나를 보살펴주고 먹고 자고 모든것을 책임져 준 천사다.

나는 7살에서 9살들이가서 공부하는 한국학교에가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 집에서 러시아성경, 한글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을 알아갔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예수님을 믿게됐다. 내가 죽어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을 믿게되었다. 한글 성경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은 성경을 쓴 노트가 수십권이나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고 읽고 깨달아 가니 인생을 뒤돌아 볼 여유가 생겨나서 카자흐스탄에 친척들에게 필요한 만큼씩 돈을 보내주고 있다. 장례일이 생기면 300불정도 보내준다. 300불은 그곳에서 3개월치 월급이니 적은 돈이 아니므로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제일 잘한 일은 예수님을 믿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게된 것이다. 이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손자가 법대에 입학하고 외손자도 법대를 졸업하여 1년 경력 쌓은 후 시험봐서 변호사 한다고 하니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현재 살고 있는 콘도에 우연한 기회에 쓰레기장을 보니 돈이 되는 빈 병들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놀고 있으면 뭘 하나 싶은 생각에 두시간 마다 한번씩 쓰레기장을 찾아 빈병들을 주워 팔았더니 재미도 있고 건강도 좋아졌다. 빈 병을 팔아 모은 돈으로 알래스카 여행을 갔을 때 양권사에게 3000불짜리 다이야 반지를 사 주었다. 보석가게 주인이 빈 병 팔아 모은 돈이라 했더니 이런 일을 보지 못했다고 하며 500불이나 깍아 주었다. 내년에 양권사는 90살이 되는데 크게 잔치 해 주려고 부지런히 목표를 세워 병을 모아 팔고 있다.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나에겐 큰 축복이라고 여겨진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남은 생애는 덤으로 받은 인생으로 생각하고 평생 감사하며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늘 예배하는 인생으로 살 것을 다짐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린다. 할렐루야 아멘^^

** 김 블라디미르 / 1942년 5월20일생 고려인 2세 / 카자흐스탄에서 출생 / 타지키스탄 법대 졸업 / 카자흐스탄 검사 역임 / 카자흐스탄 변호사 역임 / 2000년 자녀 초청으로 캐나다 이민 현재 밴쿠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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