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사인끝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빅토리아문학회 9월 월례회가 있었다.

금년 여름에 새 회원 두 사람이 영입되어 이제 여섯명의 회원들이 열심히 공부하고있다. 매월 한 사람씩 자신이 발표할 것을 준비해와서 회원들과 나눈다. 오늘 공부는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편지’를 읽고난 감상문이였다. 회원 전체가 서로의 느낌과 정약용 선생에대해 아는 지식들을 나누었다.

“천주학쟁이” 다산

끈질기게 붙어 다닌 “천주학쟁이”라는 붉은 꼬리표 때문에 정약용 선생은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늘날의 정약용 선생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사후 중앙의 세도정치라는 혼탁한 정국 속에서 벼슬살이를 계속하였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선비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으로 인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하며 남긴 방대한 <여유당전서>는 그를 주자와 견주는,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의 보고”가 되었다.

다산의 일생은 자의든 타의든 천주교와의 연관성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 선생은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인으로서 북경에 가서 처음으로 서양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정약용 선생의 매형이다. 최초의 천주교리연구회장(明道會長) 으로서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정약용 선생의 셋째형이다. 진산사건으로 효수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정약용 선생의 외사촌 형이고 백서(帛書)사건으로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딸 즉, 정약용 선생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고향 마재는 서양학문(西學)에 대한 관심이 서양의 신앙(西敎)으로 발전하면서 피어린 순교의 역사를 배태한 “자궁”이었다.

“북쪽바람 눈 휘몰 듯이 나를 몰아 붙여/
머나먼 남쪽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던졌구료“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죽음은 겨우 면하였지만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 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거처를 정한 정약용 선생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禮記)> 연구에 열중한다.

18년간의 유배기간동안 1백권의 저서 편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지않고 계속피는 한련화
첫 머리 올림

______________________

날씨 : 18도 매우 맑고 따뜻했음 / 추분 (가을이 발을 내 디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