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는 오래전 헤어진 옛 남편으로부터 갑자기 메일을 받았다. 결혼생활 내내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헤어진지 삼 십년 만이다. 내세가 있다면 그때도 절대로 안 보겠다며 매섭게 헤어진 옛 남편 K. 그의 메일은 그녀가 K를 처음 만났을 처녀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간다.

“당신이 괜찮다면 함께 식사 한번하고 싶구려.” K는 정인에게 존재말로 글을 보내왔다. 과거 함께 살때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어색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메 일을 받고 정인은 잠시 머리가 정지된 상태가 된다.

“그러죠” K가 갑자기 보낸 메일은 정인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이제는자신이 옛남편이었던K에대해더이상의미움을갖고있지않은것을알았다.

일 주일 후에 K를 만나게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설레이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하다. K 와 헤어지고나서 정인은 삼십여년동안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가? 그러나 이 나이즈음에와 서 과거를 들먹거릴 일이 뭐 있겠는가?

정인은 옛남편 K를 만나려고 평소에 잘 안 하던 매니큐어도 바르고 미장원에가서 머리고 곱게 하고는 예정된 시간 보다 조금일찍 집을 나섰다. 옛남편 K가 지정해 준 식당은 그와 함께 살때 자주 찾아가던 풍치좋은 서양식당이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만들 어 주말에 찾아가던 집 근처의 그 식당은 아직도 건재했다. 언제나 둘이 앉아 식사하던 자리가 마침 비어있었다. 정인은 창가에서 식당 정원을 바라보는것을 좋아했고 남편 K는 그녀와 마 주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약속 시간이 되니 K가 “하이, 잘있었소?”하며 손을 흔들고 성큼성큼 식당안으로 들어온 다. 사실정인은집을나서면서과연K를만나면무슨말을먼저해야할지혼란스러웠다.그 냥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K는 역시 정인에게 존대말을 하면서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여기가 우리가 늘 앉던자리군요” 라며 K는 기분좋은 목소리를 낸다. 정인이 앞에 앉아있는 K는 청년시절의 그 멋 있던 그 모습은 어디로 날려보냈는지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있다.

“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소” K는 식당 의자에 앉자마자 정인에게 말했다. “사과라니요?” 갑자기 당하는 사과라는 말에 정인은 짐짓 놀라는 표정이다.
“내가 너무 몰랐소. 나는 그때 너무 철이 없었나보오. 내가 당신과 헤어지고 많은 여자를 만나 보았지만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소. 나를 용서해주오.”
“용서고뭐고가 있나요? 우리에게는 이제 시간이 많지 않은걸요. 이제 다 잊어요 서로.” 정

인은 나오려는 눈물을 꼬옥참는다. 그녀는 애써 예의를 갖추면서 K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당신이 아이들을 잘 길러주어서 지금처럼 자기일에 충실하며 사회 생활을 잘 하잖소. 우 리아이들은모두당신을닮아성격도좋소.난성질이원만하지못한것당신이잘알잖소.살면 서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힘들게 했던 세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소.”

K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동안 K는 몇 번의 재혼을 시도했고 지금도 함께 사는 여자와 그리 행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 한잔 합시다. 당신은 맥주를 좋아했죠?” “그래요. 참 당신 은 적포도주를 좋아했죠?”

둘은 서로의 취향을 기억하면서 웨이터가 가져다준 와인과 맥주를 놓고 가벼운 건배를 올 렸다. 처음 어색함이 어느순간 사라지고 아이들의 아버지요 엄마인 이 둘은 어렵지않게 대화 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식사 후 헤어지면서 K가 손을 내민다. “다시한번 미안하오. 건강 잘 챙기소. 그동안 사실 당 신이 많이 고생하고 사는 것 같아 늘 마음이 불편했소. 이제 얼굴을 보고가니 그나마 내 근심 이 조금 놓이는구려.”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지 식당 밖에서 바로 나서지 못하고 주춤하던 K가 정인의 볼에 수줍 은 듯 살째기 뽀뽀를 해 준다. 얼떨결에 받는 그 연한 키쓰는 그리 감미롭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다. “건강해요.” 그가 타고왔던 자동차 꼬리가 그녀의 눈에서 멀어지는데 갑자기 정인이 의 눈에서 한방울 뜨거운 물이 ‘뚝’ 하며 떨어진다.

그가 떠나가고 난 자리에서 정인은 한 동안 멍 하니 서 있었다.

‘그는 내 남자였어. 그가 왜 지금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아가는거지? 꿈이었어. 내가 꿈을 꾼 거야.

내 결혼생활도 꿈이었을꺼야. 내가 처음 만난 남자는 오늘처럼 신사였고 정있고 자상하고 멋진남자였다구.그리고처음부터 우린 서로를많이좋아했었잖아.아무도우리의사랑을막 을 수 없었잖아. 사랑이 왜 나누어 져야하지?’

운전대를잡고집으로향하는그녀의자동차가흔들린다.가로수도흔들리고하늘도흔들린 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마구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