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1, 2015

     엘리샤 리 수필가, 화가/빅토리아문학회 회원

하희는 새벽녁에 전화기에서 귀를 간지럽히며 들어오는 작은 소리에 잠이 깼다. 잠을 잘 때는 언제나 전화기 볼륨을 완전히 내려 놓지만 잠귀가 밝은 그녀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에도 잠이 홀라당 깨기가 일쑤다. 더듬어 안경을 찾아 전화기에 들어온 메시지를 살피는데 갑자기 눈이 밝아진다.

“일 주 일 후 도착합니다.”
“뭐라구? 이게 누구야”

하희는 카톡 발신인이 현우임을 알고서 더 잠들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두 발을 떨어뜨리고 앉았다. 부시시한 머리를 움켜잡으면서 흥분인지 놀람인지 혹은 의아함인지도 모르는 착찹한 생각에 사로 잡힌다.
일주일은 너무 빠르잖아 왜? 갑자기?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일이다. 몇 년동안 잠적해 행방을 모르던 그가 살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할런지 혹은 소식 없이 흘러보낸 수 년동안의 괴로움을 어떻게 복수해야 할런지 머리가 복잡하다.

그를 만났던 첫 날은 초여름이었고 핏빛 노을이 바닷물을 집어 삼키던 시간이었다. 하희는 홀로 여행중이었다. 현우 또한 업무차 들른 곳이 밴쿠버섬 빅토리아다. 업무가 여행이고 여행이 생활화 된 현우는 무엇에 이끌려 처음 보는 하희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리듬을 타고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저 현우라고 합니다.”
“네 저는 하희예요. 이곳에 살고 계시나요?”
“아니요 업무차 왔습니다. 그 쪽은요?”
“아, 저는 여행 중입니다.”

이것이 인연이라고 했던가. 무섭고 떨리는 가슴으로 설레이기 시작한 두 사람. 내일 일이나 가족 일 또는 살아가야 하는 모든 것들을 중단시켜버렸던 그 날 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온 우주를 들어 올릴만큰 충만한 에너지를 발산했던 그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다시 만날 기약을 어찌 할 수 있었을까만은 일상으로 돌아온 하희는 매일 그의 소식을 기다렸었다. 매정하리만큼 오지 않는 전화기에 눈을 맞추고 오지 않는 메일을 기다려본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와서 메일 박스를 열어보면서 낙망하며 실망하고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고도 슬픈 세월을 보내왔었다.

“신의 뜻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현우가 떠나면서 하희에게 한 말이다.
“신의 뜻요? 그것도 사람이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많은 세월을 소리없이 보내고 그가 온다.
신이 허락하셨을까?

벽을 쳐다보면 많이 울던 그 사랑.
떠나가는 사랑이 아쉬워 불안하던 그 사랑.

이제는 심드렁한 그와의 감정이라서 그럴까 현우의 방문 소식을 전달 받고 오히려 침착해진다. 역시 세월이 약인가보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사랑은 많이 하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그와의 사랑에 변명이 있을 수 있을까만은 잠시 몇 시간을 만나기 위해 무려 열여섯 시간의 비행 시간을 소모해야 하면서 오는 현우를 용서 하기로 했다.

하희는 꿈을 꾼다.
많은 군중 속에서 자기 만을 쳐다보는 남자 현우를 발견한다. 하희가 소리를 지르며 군중을 제치고 달려가는데 손의 끝 자락이 닿지 않으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안타깝다. 이번에 만나고 또 다시 이렇게 안타깝게 세월이 흘러가려나보다. 불안하다. 하희는 다시 잠 이들고 부드러운 현우의 손이 어깨를 두드린다. 하희의 하얀 속살이 그의 손끝에 닿는다. 감미롭다.

“아, 이제는 놓치지 않을꺼야. 이제 너를 내 안에 영원히 가두어 둘꺼야.”

“사랑아 너 거기 머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