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평론가 / 빅토리아문학회 회원

혼란한 시기의 민초들이 어떤 처세를 가져야 몸을 오래 보존할 수 있을까. 어제의 강국이 오늘의 약소국이 되고 오늘의 약소국이 내일의 강대국이 되는 흥하고 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침략과 살륙,약탈과 강간의 아비규환 같은 세상을 살면서 당해야 했던 민초들의 절망과 비통을 생각해 보면 노자가 왜 몸보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나를 알게 된다. 노자는 민초들이 몸을 보존하는 신존(身存)의 방법으로 외기신(外其身)과 후기신(後其身)을 든다. 외기신(外其身)은 세상의 밖에 몸을 둔다는 말로 명예나 이익, 시시비비의 일반 세상사에 끼여들지 말라는 뜻이다. 후기신(後其身)은 몸을 뒤로 둔다는 말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말고 없는듯이 살라는 뜻이다. 아무리 고고한 사상과 철학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라도 몸을 보존 못하고 죽음을 당한다면 사상이나 신념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혼란한 세상에서 몸보존이 으뜸이 되는 이유이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상의 선(최고로 좋은 것)은 물과 같다. 왜냐하면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노자가 도덕경 상선(上善)장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이 바로 부쟁(不爭)이다. 부쟁(不爭)은 다투지 말라는 말로 적은 이익을 갖고 다투지 말고 남과 싸우지 말라는 뜻이다. 노자의 도덕경중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는 문구가 바로 이 상선약수(上善若水)인데 글쓰는 많은 사람들이 물에서 깊은 철학적 의미를 찾고 있지만 정작 이 문구를 만들어낸 노자는 몸보존하는 방법의 하나인 외기신(外其身)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싸우지 않는다는 것,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나로서는 쉽게 수긍하고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이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말은 그래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한편으로는 폭우나 홍수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롭다는 뜻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그러니 물은 평소엔 만물을 이롭게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예를들어 불의(不義)라던지 악(惡)에게는) 재앙을 줄 수도 있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 더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다투지 않는다’ 는 의미와 다음의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한다’ 는 의미는 매우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 노자는 물의 속성을 다투지 않는다고 보았을까? 흘러가는 물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듯 꾸준히 흐르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황하나 양자강같은 큰 물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나기 후 좁은 골짜기엔 오히려 서로 앞서 가려고 요란하게 다투며 흐르는 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물은 흐르면서 장애물을 만나면(예를들어 악(惡)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싸워 이겨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질이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물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은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문이다. 물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물이 있는 곳에서 살며 움직이기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사는 곳에 가까이 있는 물은 깨끗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니 물이 사람이 많은 곳에 가까이 가기를 싫어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역시 주관적 느낌이다. 물이 어디 장소를 가려 주체적으로 머물수나 있는 것인가.

어떤 도덕경 해설서는 이 구절을 ‘물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라고 해석한다. 의미가 정 반대로 된 이 해석은 무슨 말인지 더욱 알 수 없는 애매한 말이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들의 설명은 사람이 싫어하는 곳은 낮은 곳이니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에 부합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싫어하는 곳은 낮은 곳일 수도 있고 높은 곳일 수도 있고 평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편견에 가까운 것을 주장하는 것일 뿐 설득력이 없다.

그러니 이 장은 노자가 신존(身存) 장에서 말한 외기신(外其身)을 강조하려고 억지로 끌어다 붙인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몸보존을 강조하려고 사용한 물의 속성은 별로 좋은 예문이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사람들은 거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며 노자의 이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나서 우리가 물에서 배우고 깨우칠 물의 속성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대로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본다

첫째 물의 흐름에서 보는 꾸준성과 일관성이 있다.

강 둑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물을 보면 우리는 범접할 수 없는 장중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얕은 꾀를 가지고 인생을 가볍게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물의 속성이다.
또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댓돌에 구멍을 내는 것을 보며 한 가지 일에 꾸준하다 보면 그 방면에서 전문가가 되고 성취도 할 수 있으며 보람도 느낄 수 있다는 교훈도 깨우치게 된다.

둘째 물이 흐르다 작은 장애물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해결해 가면서 사는 것 또한 숙명적 인생이다. 보편적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만인의 행복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핵심요체임에도 주위에서 끊임없이 옳지 못한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세상에는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저 혼자 잘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고 악(惡)이 상재(常在)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악을 향해 채찍을 든 것을 읽으며 옳지 않은 것과 악을 물리치며 나아가는 건전한 사회를 생각할 때 물이 주는 교훈은 적지 않다고 본다

셋째 골짜기의 물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 적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된다. 모든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오판하는 독재자와 억압받는 힘없는 민중이 동시에 새겨야 할 물이 주는 좋은 교훈이다. 민초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없어 언제나 당하고 사는 약한 존재이지만 의식을 깨우치면 무한한 힘으로 결집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리라.

넷째 모든 생물을 이롭게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공기나 물이 없으면 생물이 존재할 수 없고 백성이 없으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물이 생물에게 절대적 존재이듯 위정자에겐 백성이 절대적 존재이어야만 한다. 권력을 쥔 자들이 인민을 핍박하고 기만하면 언젠가는 백성들이 폭발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현대사에서 종종 본다 멀게는 프랑스 혁명, 가깝게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등 악이 세상에 만연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가게 되면 폭우나 홍수로 더러움을 한번에 쓸어버리듯 악을 쓸어버리는 것은 물과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위정자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다섯째 낮은 곳을 지향한다.

이것은 종교에서 강조하는 겸손을 일컫는 말로 해설이 필요치 않을 만큼 널리 알려진 세상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몸가짐이다

여섯째 조금씩 조금씩 부드럽게 스민다.

태산같은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스미는 물에서 시작한다. 상대를 만나 설득시키고 이기는 것은 물이 스미듯 조금씩 조금씩 부드럽게 영향을 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며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사회법칙일 것이다. 지나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닌 따스한 해라는 이솝우화 즉 햇볕정책과 상통하는 내용이 되겠다.

일곱째 물은 때로는 구비구비 돌아서 흐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타협이 아니다. 더 좋은 방법을 찾는 현명함이며 한 걸음 멈춰서 생각하는 느긋함이며 집착에서 벗어나는 여유로움이며 종교적 관조의 경지인 것이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야 할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는 것도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자가 제시한 몸보존 방법으로서의 나서지 않고 뒤로 몸을 숨기는 외기신(外其身)과 후기신(後其身)은 문제 해결의 올바른 방식이 아닌 것을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