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 당신 방에서 만나요.”
저녁 식사 후 TV를 보던 석구가 기세 좋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미옥은 잠간 고개를 갸웃둥한다. 3년 전 서로 코고는 시끄러운 소리에 네 탓 내 탓 잠을 못 잔다고 투덜대다가 비어있는 건너 방으로 남편이 잠자리를 옮긴 이 후 잠도 잘 잘 수 있고 홀가분해 좋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남편이 간혹 안방을 찾아 들었지만 준비도 그렇고 뒤처리도 귀찮고 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지가 꽤 됬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그렇게 당당한지 그 기세에 바로 대꾸도 못한 사이 남편이 나가 버리고 그녀는 잠시 무슨 일일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오늘이 내 생일이니까 그 핑계로 무드 한 번 잡아 보자고 엉뚱한 생각하는 거겠지.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참…’
미옥은 쯧쯧 혀를 차고는 화장대에 앉아 얼굴에 크린싱 크림을 찍어 바른다. 크림이 묻어 있는 상태로 무심코 오른쪽 가운데 설합을 조심스럽게 열어 본다. 한동안 설합이 잘 열리지 않아서 남편에게 부탁해 고쳐 놓은 것인데도 워낙 오래된 가구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설합 안에 있는 반지, 귀걸이, 목걸이, 팔찌들을 흐믓하게 바라본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느긋해진다. 남편이 명퇴하기 이전 회사에서 잘 나갈 때 사준 것들이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생일, 결혼 기념일,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에는 물론 수시로 있던 해외 출장 때마다 선물로 사주었기 때문에 설합 안에 가득 있어 바라 보는 것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좋은 시절 다 가고 생일 때도 어쩌다 자식들이 챙겨 주어 저녁 외식하는 것으로 때우는 형편이고 남편한테서는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벌이가 없으니 그러러니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바람이 든 것 같이 서늘해진다.
“여보 생일 축하해! 자 이거. 틀림없이 당신이 좋아할만한 선물일 거야. 열어 봐!”
석구는 짐짓 그윽한 눈을 하고 미옥을 바라본다. 오늘 밤은 드라마처럼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보려했던 생각이 웬지 계면쩍어 씩-하고 웃는다.
“어머! 왠일이에요 당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미옥은 누구에게 빼앗길 새라 재빨리 낚아 채 포장을 뜯는다. 흰색에 분홍이 엷게 비친 자디잔 진주 알들이 꿰어져 있는 14K 진주 목걸이다.
“어때 마음에 들어?”
역시 배우같은 연기를 흉내 내며 다시 한 번 멋적게 웃음을 흘린다.
“…고마워…요”
말 끝에 약간 목이 잠긴다. 미옥은 목걸이를 손에 들고 남편을 바라본다. 남편이 목걸이를 건네 받아 그녀에게로 가서 목에 걸어주며 드라마에서 처럼 뒷 목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다. 미옥은 화장대 거울을 통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고 또 만지며 행복해 한다. 남편이 팔을 둘러 그녀의 어깨를 안고 뺨에 키스한다. 거울을 통해 남편을 빤히 바라보는 미옥의 볼이 홍조를 띈다.
“여보 이 목걸이 당신이 산 거에요?”
며칠동안 선물 받은 목걸이로 치장하고 외출을 하던 미옥이 오늘은 돌아오자 마자 느닷없이 남편에게 묻는다. 석구가 순간 멈칫하고 놀란다. 그리고는 이내 태도를 바로 잡으며 태연하게
“그럼. 내가 산 거지.”
“언제 산 거에요?”
대답이 끝나기가 바쁘게 미옥이 다그친다.
“어?…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그건 왜 묻지?”
어찌된 일인가 싶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우물 되묻는다.
“글쎄 언제 산 거냐니까요? 왜 대답을 못해요.”
따지듯 묻는 기세가 뭔가 잘 못 된 거 같은 데 우물쭈물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당신 생일 전 날 샀는데 뭐가 잘 못 됬어?… 왜 그러는 건데?”
“당신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 걸 샀어요? ”
아하! 돈 걱정을 해서 묻는 거로구나 안심을 하고 석구는 크게 인심을 쓰듯 대답한다.
“돈이 없긴. 그동안 애들이 용돈 준거 모아 둔 게 있었지.”
“사긴 뭘 사요. 당신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요. 내가 다 알아요.”
“왜 돈이 없어. 내가 돈 쓸 일이 어딨다고. 애들이 준 돈 그대로 다 있을 수 밖에. 그리고 뭘 다 알아. 내가 돈이 없으면 그럼 그걸 어디서 훔쳐서 당신에게 선물을 했단 말이야! 허… 참.”
뭔가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추측으로 다그쳐 보는데 남편이 펄쩍 뛰며 화를 내는 바람에 미옥이 슬그머니 수그러들 수 밖에 없다.
“훔쳤다는게 아니라…이게 옛날에 당신이 사 준 목걸이 하고 똑같은 거니까 그러죠.”
석구는 별안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래…? 옛날에 내가 그거랑 똑 같은 거를 선물했다고? 그럴리가…”
“오늘 가영이를 만났는데 이 목걸이가 옛날 거와 같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럴리 없다고 했더니 그 당시 이 목걸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있어 보여 주었어요. 틀림없어요.”
“그래?…그러면 같은 게 하나 더 있겠네. 그러지 말고 찾아 봐. 같은 거를 또 샀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보석에 대해 뭘 아나. 모르니 골라 본들 내내 같은 걸 골랐던 걸 거야. 어디 있겠지. 찾아 봐.”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다그치는 석구의 태도가 어딘지 안절부절 중구난방이다.
“그런데 그게 이상해요. 나도 긴가민가해서 찾아 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요.”
그녀가 기억이 잘 안 난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목소리가 차분해 진다.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야 도대체. 나야 남자니까 그런게 기억 안 나지만 당신은 보석 좋아하는 여자 아냐. 어떻게 그런 걸 기억 못할 수가 있어.”
“글쎄 그게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쐐기를 박듯 마지막 한마디를 덧 붙인다.
“그런데 이상하네. 나도 당신이 그 목걸이를 하고 있던 걸 본 적이 없었는데… 혹시 누구한테 빌려서 목에 걸고 찍은 사진 아냐? 여자들 곧 잘 그러는 거 아닌가? 잘 생각해 봐.”
아침 일찍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은 두 사람이 약수 물통을 들고 허연 입김을 뿜어 내며 약수터가 있는 산 길을 오른다.
“자네 이번에 멋진 일 한판 잘 벌렸더군. 어떻게 그런 대담한 생각을 했나. 참 대단해.”
허리띠 뒷 춤에 하얀 수건을 찬 규현이 싱글싱글 웃으며 석구를 돌아 본다.
“뚱단지 같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집사람한테 자초지종 얘기 들었어. 미옥씨가 깜쪽같이 속았다며?”
“무슨 얘기? 우리 집 사람이 속은 건 또 뭐고.”
“진주 목걸이 말이야. 시치미떼지 말고 이실직고 해 보게.”
“아 그거…? 그거 말이야… 음… 나야 생일 선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보석을 준 거지만… 흐흐…자넨 지난 크리스마스 때 가영씨 한테 뭐 우람한 철제 선반을 선물했다며. 후후… 이 사람아 그래 이 나이 되기까지 그렇게도 여자를 모르나?… 철재 선반? 푸하하하… ”
석구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허리를 비틀며 웃음을 터뜨린다.
“이 사람아. 그 얘긴 이제 그만하고. 자네 진주 목걸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연히…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그런데 꼭 입 다물기야. 우리 집사람이 알면 안되니까.”
“알아. 우리 집사람에게도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지난 번에 화장대 설합이 고장 나 고치면서 설합 안쪽 바닥에서 찾았는데 그동안 전혀 못 보던 거였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25년 됬나? 예전에 내가 사 준 거 같더라고. 아마도 몇 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 쪽으로 떨어뜨리고 본인도 까맣게 잊어 버린 거 같았어. 그런 거라면 새 종이로 포장해 다시 선물을 하더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거지. 안 그런가? 가영씨가 기억력이 좋고 함께 찍은 사진까지 있어 이렇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우리 집사람은 내가 새로 산 거로 알고 있으니까 다행이지… 아니. 오히려 그렇게 믿는 게 본인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 모처럼 행복해 하던데…”
“그렇게라도 행복하다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잘 했네. 잘 했어.”
석구는 발을 멈추고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찌뿌둥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참 알 수 없는 게 여자야. 뭐 그런 돌덩이 하나에 행복해 할 수 있는지…”
참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고 날다 길 가 나무 앙상한 가지에 내려 와 앉는다. 바로 뒤따라 또 한 마리가 쫒아 와 다른 가지에 앉는다. 그는 움추렸던 어깨를 쭉 펴고 후-하고 숨을 크게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