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엎힌 H는 자정을 넘긴 겨울 밤보다 무겁고 차가웠다. 가는 길을 늦춰 보려는듯 그는 발끝으로 젖은 흙바닥위에 깊은 자욱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침대시트로 적당히 둘러싼 그를 조수석에 앉히고 나서야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시동을 끄자 매끈한 렉서스 ES도 나처럼 안정을 찾았다. 평소 단정했던 머리칼은 헝클어진채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H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사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 그의 가장 젊은 날이 박제되었으니, 절명 앞에서도 초라하지 않다. 이제 나는 그가 옮겨왔던 곳으로가 또 다른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밤의 운명이고 숙명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일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갈께요.” S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마주앉은 유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시애틀에 홀로 계신 고모님이 시동을 켜둔 상태로 차고에 주차했다가 침실로 스며든 배기가스에 질식사 하셨다고 한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나흘 지낼 옷가지를 여행가방에 차근히 옮겨담자 엶은 미소가 번졌다. 두 달만에 다시 H의 침실에서 한 숨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모든게 가벼워졌다. 마음을 깨닫고 난뒤에 오히려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사라졌다. 그녀의 남편은 자녀교육이 중요하다며 그녀를 타국으로 밀어내고 사업에 여념이 없었다. 사랑해서 결혼한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부부사이에는 의리가 있었다. H를 만나기 전까지…
H는 그녀의 집에서 어린 유학생들과 오래 지낼 계획은 없었다. 곧 밟게될 박사과정 전에 야영이나 하면서 머리를 식히고자 빅토리아에 온것 뿐이었다. 출국을 며칠 앞둔 그날 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옛 연인은 유부남에게 빼앗겼고, 눈앞에 선 그녀의 남편은 여기에 없지 않은가. 그들은 전혀 무관했지만, 남편을 빼앗긴 못난 여자들에 대한 원망이 S를 향하던 참이었다. 그는 그녀의 방문을 열었고, 그녀는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갈곳없던 애증은 그녀의 품안에서 사라졌다. 일말의 죄책감이나 고민없이 서로를 안았고 그 날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S가 먼저 끝을 내기전까지…
침실 머리맡 협탁위에는 반쯤 비워진 와인병과 두 개의 빈 잔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밤을 기념하듯 기꺼이 잔을 비웠고, 침실로 새어드는 유독가스에 아무런 저항없이 영원히 잠들었다. 그녀는 마치 예술가의 손에서 방금 태어난 조각상처럼 침대위에 뉘어져 있었다. 온기를 빼앗긴 육체는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흔들어 깨우면 눈을 뜰것 같았다. 나는 바로 누운 그녀의 왼팔과 등을 반쯤 일으켜 세워 가로 눕게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어깨뒤로 넘기자 그녀의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 오랫동안 익숙했지만, 그가 온뒤로 그녀는 나를 안는것조차 잊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창백한 뺨,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가슴, 능선을 연상케 하는 골반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그녀의 가는 다리는 수줍게 포개져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왼손을 나의 상기된 오른뺨에 올리자 그녀의 눈이 무겁게 눈물을 밀어내며 나를 바라봤다. 따뜻한 그녀의 눈길을 마주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대신 새어나오는 가는 숨은 내게 닿기도 전에 사라지길 반복했다. 나는 죽음에 잠식되는 그녀를 대신해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 가까이 누웠다. “당신이 나의 처음을 함께 해준 그때처럼 나는 당신의 마지막을 배웅할께요. 어머니.” 나는 다시 그녀를 바로 눕히고 그녀가 즐겨입던 옷을 입혔다.
와인병은 완전히 비우고, 잔들은 깨끗한 식기와 같이넣고 세척기를 작동시켰다 침실은 H의 흔적이 지워진채 조용히 닫혔다. 이제 나는 그와 전에 갔던 야영지 뒷편 벚나무숲으로 그를 데려가려 한다. ‘햇볕이 많이 닿는곳에 꽃도 열매도 더 많이 열리는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거야. 가지가 꺽이도록 열매가 열리고 흐드러지게 향기가 흩날리는 봄날이 그리워.’ 어머니가 되뇌던 벚나무숲은 그녀를 대신해 그를 품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