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상현 (빅토리아문학회 회원 )

#1 Rockland Ave., 한 주택

2016년 5월. 빅토리아 록랜드의 한 가정집 정원에 잔잔한 클라리넷 소리가 들린다. 그 선율에 깨어났는지 보라색 라일락꽃이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자그마한 산책로 입구에 세워진 프랑스 작가 볼테르의 흉상. 그 너머로 빨간 만병초가 만개해 있다. 빅토리아 음악학교 기금마련을 위해 자신의 집을 흔쾌히 개방한 노신사. 그는 먼발치 현관문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계단 몇 개를 천천히 올라가 그가 앉아있는 곳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혹시 짐 먼로(Jim Munro)씨 아니세요?”
“맞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전 부인이셨던 엘리스(Alice) 먼로 여사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정원이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아주 깨끗하고 인상적입니다.”

(천천히 흐려지던 장면이 흑백으로 바뀌며)

1963년 어느 봄. 음악학교 학생들이 관악기를 연주하던 곳에서 어린 남매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 다닌다. 이들을 간간히 내려다보는 엘리스. 변변한 책상이 없어 식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때, ‘띵동 띵동’ 초인종이 짧게 두 번 울린다. 오랜만에 찾아 온 친구다. 쓰던 원고를 식탁 한쪽으로 밀어놓은 엘리스. 따끈한 홍차를 타서 그녀와 마주앉는다. 엘리스의 입에서 가늘게 한숨이 나온다.
“글쎄, 서점에서 일하며 잘 지내는 줄 알았더니 웬 작가타령이야? 식탁에서 무슨 글이 써지겠어?”
“어떻게든 해봐야지. 남편에게 큰 소리를 쳤거든.”
“뭐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이런 형편없는 책들이나 팔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직접 훌륭한 글을 써보겠다?”
대답 대신 다시 시선을 정원으로 돌리는 엘리스. 아이들 손엔 앙증맞은 남색 물망초꽃 몇 송이가 들려있다.

#2 Inner Harbour, 한 호텔방

2013년 10월10일 새벽 4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빅토리아 인너하버의 한 호텔방. 밤새 뒤척이다 설핏 잠이든 엘리스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망설이던 그녀가 핸드폰을 천천히 집어 든다. 팔순에 접어든 그녀의 쭈글쭈글한 손바닥 위에서 딸의 이름이 형광 빛으로 반짝거린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후보자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크게 기대하진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109명의 수상자가 배출됐지만, 아직 단편소설만을 써온 작가가 이 상을 받은 전례가 없는 탓이었다. 게다가, 캐나다 국적의 문학가가 이런 영예를 누려본 일도 아직 없었다.
“엄마! 어떡해!”
“왜 그러는데? 난 아무래도 괜찮다니까.”
“스웨덴에서 전화가 왔어요. 방금 결정됐다고.”
“그래? 이번엔 누가 받았대?”
“엄마라니까. 엄마가 110번째 수상자가 됐다고.”

#3 Government St., 먼로 서점

2015년 겨울. 시원하게 트인 천정 아래로 고풍스런 참나무 서가가 늘어서있는 서점(Munro’s Books). 그 맨 뒤쪽, 어린이 책들이 진열된 곳이 수선스럽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통통한 신랑이 간소한 예식을 치르는 중. 처음 이곳을 찾은 나와 아내는 뜻하지 않게 ‘서점 결혼식’이라는 이색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머리 장식도 없이 수수한 드레스 차림의 신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른다.
“자기야 여기 와봐! 엘리스 먼로 작품들이 한곳에 있네.”
진열대를 훑어보던 아내가 나를 부른다.
“그러네. <디어 라이프> <런 어웨이>에 <패밀리 퍼니싱>도 있네.”
“책 위에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이라는 라벨이 붙어있어.”
“이런 분이 우리 이웃이라는 게 참 행복한 일이네.”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부. 화면 블랙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