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숙 (빅토리아문학회 회원)

오늘 새벽 빅토리아 리버 스트릿 한 주택가 지하 암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출동한 소방당국은 화재 진압에 힘을 기울였지만, 침실에 잠들어 있던 덴부룩 부부는 인화물질이 타면서 발생한 유독가스로 숨진채 발견됐습니다.

캠핑을 다녀오는 길에 들르곤 하던 농가에서 노란 병아리 2마리를 얻었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마당한켠 닭장안에 상자와 모이를 넣어주니 꽤 그럴듯 해보였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우리 쌍둥이와 꼭닮은 병아리들을 애써 구분해가며 스케치북을 채워나갔다. 셰넌은 그런 내 옆에서 병아리가 움직이지 않게 가는 막대로 이리저리 병아리들을 몰았다. 쉼없이 모이를 쪼아대던 병아리 깃털 사이로 갈색빛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크레파스를 이리저리 뒤적이던 나의 손을 벗어난 노란색이 닭장 밑으로 굴러들어갔다. 셰넌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제법 날카로워진 병아리 부리끝에 쪼인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놀란 나는 서둘러 다용도실 선반위에 있는 구급상자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또래보다 작은 아홉살 소년에게는 의자위에서 까치발을 서고 나서야 가까스로 상자에 손이 닿았다. 급한 마음에 열어젖힌 구급상자안에서 각종 응급처치 용품이 바닥에 쏟아지자 마음만 더 다급해졌다. 가까스로 밴드를 찾아서 마당으로 나갔지만,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만 덩그러니 나를 기다렸다. 나는 몇차례 뒷마당과 창고를 둘러보며 셰넌을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밤낮없이 울어대던 병아리들도 보이지 않았다. 빈 닭장앞에 서있던 나를 셰넌이 불렀다. 셰넌은 아무 말없이 나를 주방으로 끌었고, 나역시 그녀를 조용히 따랐다.

위층 서재에 계신 부모님은 주말에 열리는 맥주 홍보 준비로 분주했지만, 일층 거실과 주방은 조용했다. 두 분이 의견을 나누거나, 홍보책자를 뒤적이며 거래처와 통화하는 동안 아래층의 나와 셰넌은 잊혀진 듯했다. 셰넌은 손가락으로 스토브 위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작은 냄비를 가리켰다. 냄비위에는 닭장을 고이던 돌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셰넌은 뭐가 재밌는지 연신 웃어대며 내게 줄 선물을 냄비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나는 오른손에 밴드를 옮겨쥐고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뻗었다. 뚜껑을 잡으려던 찰나 뭔가 안에서 부딪혔고, 낚아채듯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머리속까지 파고드는 역한 냄새가 주방을 뒤덮었을때 냄비안에는 반쯤탄 병아리 두 마리가 뒤엉켜 있었다. 그일로 셰넌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은 담장을 기어오르는 이웃집 고양이에 닿아 있을뿐이었다.
아이들은 한번쯤 작은동물을 괴롭히면서 자신을 힘을 실험해볼 뿐이라며 아버지는 애써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신혼부부는 자신들의 고양이가 쉐넌에게 목졸려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 거칠게 숨을 뱉으며 발버둥치던 고양이는 회색 털사이로 호박색 눈알을 쏟아냈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이웃집 아내는 3개월된 태아를 잃엇다.

셰넌의 정신의학과 상담치료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모두 셰넌의 기행을 막기위한 상담교육도 병행되었다. 의사는 셰넌이 타인의 감정과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했고, 동물을 해치는 것을 멈추기 위해 감정에 호소하는것은 무용지물이라했다. 오히려 가축을 도축하는 자격과 방법을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무렵, 셰넌이 사진을 배운건 부모님의 강요와 설득탓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진을 찍다보면 상대방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을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셰넌은 대부분의 시간을 수동 카메라의 기능을 익히거나 피사체를 담는데 할애했다. 숨죽여 피사체를 들여다는 보는 그녀의 모습은 세포 하나 하나를 헤집듯 침착하고 진지했다. 시간은 멈추어 있는듯 했고, 그녀의 눈부신 금빛 머리칼만 바람에 일렁일뿐 이었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나는 동부의 사립 기숙학교로 입학을 했다.

수업을 마친뒤에는 특별한 과외할동없이 미술실에 틀어박혀 라디오를 들으며 반 고흐 추모전 준비를 했다. 기숙사가 조용한 주말이면 친구들의 이젤에 캔버스를 모두 걸어 나를 에워쌌다. 쉴틈없이 캔버스를 오가며 떠오르는 이미지를 닥치는데로 그렸다. 하지만 노란색 물감을 쓰는일은 절대 없었다. 노란색은 무감각하게 감춰뒀던 상처를 자극하고, 셰넌의 광기를 회복시키는 것 같았다. 태양을 쫓던 반 고흐가 열망하던 노란색없이 그의 추모작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감으로 뒤덮인 캔버스는 쌓여갔지만, 풍요로움 대신 푸른 빈곤함이 가득했다.

그 때, 라디오 뉴스가 적막한 공간속에서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덴브룩 부부의 쌍둥이 딸 15세 셰넌이 주로 암실을 사용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현재 집안 어디에도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어 경찰이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중에 있습니다.’

불현듯 모든 것이 눈에서 아득해졌다. 셰넌은 자주 나를 꿰뚫어보듯 응시했지만, 또 무엇을 보는것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얼어붙게 했었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할 시기를 점치는듯 했다. 언젠가 나는 쉐넌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함부로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 예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죽이는데 이유가 없는데, 그걸 멈춰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게 우습지 않니?” 나는 지금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녀가 사진속에 담은 동물들의 마지막 순간이 배달되던 곳. 복도끝 미술실을 향해 차분하게 가까워지는 펌프스 소리, 스패출러를 거머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