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정 선글라스를 낀 이 과장
“자, 여기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나가실 때까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보실 수가 없습니다.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에요.”
천천히 올라온 가을 해가 키 큰 전나무를 넘어서지 못하고 낑낑대고 있는 오전 10시다. 여느 때처럼 정원을 찾은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화장실 앞에서 왁자지껄하다.
“현우 아버지! 일보러 안가실거면 이 가방 좀 들고 있어요.”
“귀찮게 왜 그래? 들고 갔다 와. 그나저나 가이드 양반, 이 안에는 진짜 담배 필 데가 아무데도 없는 거요?”
육순을 훌쩍 넘겨 보이는 노신사가 아내인듯한 부인에게 쏘아 부치더니 다짜고짜 일행을 안내하는 이에게 묻는다.
“네, 아버님! 올해부터는 전면 금지에요. 작년 까지만 해도 매표소 입구 쪽에 흡연 구역이 하나 있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없앴어요.”
“참, 나. 여기가 딱 좋은 자리구만. 여편네들 화장실 가는 사이에 한 대 꼬시르면 좀 좋아!”
사람들이 두 패로 갈리어 각각 남과 여를 상징하는 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이들은 하릴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잠깐의 무료함일지라도 온전히 자신의 탓인 양 조바심을 내던 가이드는 눈동자가 전혀 안 보이는 검정색 라이방을 손가락으로 한번 슬쩍 올리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는다.
“글쎄, 이 화단에 무궁화나무가 두 그루 있었어요.”
“그게 먼 소리래요 흉측하게.”
목을 가다듬은 가이드가 말을 꺼내자, 반백의 신사가 주저 없이 목청을 높여 되받았다.
“그러게요. 우리나라의 국화(國花)를 화장실 앞에 버젓이 심어 놓았더라고요.”
“세상에! 이런 경우 없는 사람들을 봤나.”
“그래서 제가 홍보팀 담당자에게 몇 번을 요구했어요.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이 화장실 앞에만 서면 다들 화를 내시니 다른 데로 옮겨 달라고요.”
“잘했네, 잘했어. 이과장이 애국자야, 애국자. 그나저나 무궁화들은 어디로 갔대요?”
“글쎄…….그건 잘 모르겠네요.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죠.”
화장실에 들어갔던 이들이 하나 둘씩 나오자 인원파악을 끝낸 가이드는 한껏 높아진 목청으로 일행을 다시 이끌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이제 토템 폴을 지나 장미정원과 일본정원으로 이동합니다.”
☼☼ 자동 조절 선글라스를 낀 데이브
“토템 폴 뒤쪽에 텅 빈 공간 있지? 그 주변에 잡초가 많이 자라서 보기 흉하네. 커피 브레이크가 끝난 뒤에 네가 좀 정리해줄래?”
“물론이지. 그런데 왜 저기는 휑하니 비워뒀어?”
“뭐를 심어도 자리를 못 잡고 죽어나가지 뭐야. 네가 이부서로 오기 직전에는 철쭉을 심었었는데 올 봄에 또 죽었어.”
후라이드 치킨으로 유명한 패스트 푸드점 앞에 세워진 할아버지처럼 배가 불뚝하고 인상 좋게 생긴 데이브다. 그와 말을 섞고 있는 킴은 부서를 옮긴 지 한 달이 채 안된 동양계 정원사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데이브가 버릇처럼 ‘카페올 레!’라고 외쳤다. 커피 브레이크시간임을 알리는 그만의 독특한 소리다. 그와 함께 직원식당으로 가던 킴이 화장실 앞을 지날 즈음, 뭔가 떠오른 듯 잠깐 발을 멈춘다.
“맞아! 내가 입사했을 때 여기에 무궁화 두 그루가 심겨있었는데.”
“그래. 5년 전인가? 어떤 아시아인들이 자기나라 꽃이 왜 화장실 앞 화단에 있냐고 성화를 부려 결국 옮겼지 뭐야.”
“어디로 갔는데?”
“아까 거기. 빈터로 남아있던 곳 말이야. 더 안쪽에 심긴 빨강 꽃이 피는 무궁화는 살았는데 그 앞에 심겼던 하얀 꽃을 피우던 녀석은 결국 죽었어.”
“나무 나이가 얼마나 됐었는데?”
멈췄던 발걸음을 옮기던 킴이 다시 묻는다. 장미정원 쪽에서 나온 직원들과 인사를 하던 데이브가 킴을 쳐다보며 입을 연다.
“30년은 족히 더 됐을 걸. 그래서 너무 크게 자란 나무를 파내서 다른 데로 옮기는 건 위험하다며 반대했었지. 궁궐 앞이면 어떻고 화장실 앞이면 어떻다고 멀쩡하게 잘 자라던 나무를 파내라더니 결국…….”
“하긴, 요즘엔 안방 바로 옆에도 화장실을 두고 사는 시절인데 말이야.”
나란히 걷던 킴이 맞장구를 쳤다. 무궁화가 어느 나라의 국화인 줄 아느냐고 물으려다 참더니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