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일 ‘열하일기’ 공부 한 것을 문학회 월례회 때 발표한다.
회원들이 열명도 안되는 작은 모임이지만 나는 아주 많은 청중 앞에서 발표
하는 것 처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한 내용들을 컴퓨터에 입력한 후 오늘까지
여러차례 출력해서 다시 읽어본다. 글짜만 있으면 지루할 것 같아서 박지원의
풍만한 모습도 넣어놓고 중국의 세련된 가마 모양도 카피해 넣어놓았다.
공부하는 것은 정말 좋다.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활력을주고 삶의 도전장을 던저준다.
“아, 그때는 이랬구나. 어머나 기막히네. 열하까지 가는 길~ 정말 고생 많았네.” 하면서
다시 연암 박지원의 자료들을 따로 살펴본다.
그는 양반전을 비롯하여 양반들의 무능함과 허레허식을 풍자한 여러 소설들을 발표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소설. 문학이론. 철학. 경제. 천문학. 병학(兵學). 농학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청렴’을 가문의 영광으로 내거는 바람에 평생 가난과
함께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유머와 재치는 물론이요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한번도 선생에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보게된다.
‘아, 선생들은 이런 마음이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공부해서 함께 나누어 보려는 그런 심정이라고 말 하겠다.
내일 발표 후 아일랜드 이야기에도 여러번 나누어 써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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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발췌한 연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한다.
연암은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했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늠름하여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연암은 20살 전후부터 불면증에 시달려 3~4일씩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 뒤 불면증이 약화된 후에도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곤 했다. 평생 동안 하루에 고작 두어 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눈 내리는 날이나 얼음이 언 추운
겨울에도 그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연암은 나이 50살에야 평생지기 유언호의 천거로 종9품 선공감 감역이
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아내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암이 벼슬길에 나아간 지 반년도 안 되어 전주이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실컷 고생하다가 이제 좀 살만하려니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나이에 아내를
잃으면 대개 남자들은 재취를 하거나 첩을 들이곤 했다. 하지만 연암은 아내에게
절개를 지키며 여생을 홀로 살아갔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의 한 대목을 살펴본다.
51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맏며느리도 사망하여 연암에게는
끼니를 챙겨줄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 주위에서 재혼하라고 하였지만 종신토록
하지 않았고, 기생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만약 재혼하거나 첩이라도 들였다면 더욱
오래 장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음양으로 보면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인데,
연암은 순양(純陽) 체질인데다 여인이 없이 홀로 지냈으니 음양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것. 남성갱년기와 노년기에 배우자 없이 홀로 지내면서도 69세까지 지방관을
지내며 살았던 것은 아무래도 연암의 정기가 강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출처] 연암 박지원의 생애|작성자 김두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