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문학회 모임이 우리 집에서 있었다.
예정대로 연암 박지원의 문학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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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작품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 21 세기인 오늘까지 강렬한 매력을 발하고 있다.
탈근대를 외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대에도 연암의 문학은 전혀 낡지 않았다.
나는 ‘지금 조선의 시를쓰라’를 읽으면서 그의 해박하고 해학적이며 매우 인간적인 연암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혼란한 우리 시대에 연암의 문학이 살아 있는 고전으로서의
빛을 잃지 않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11개의 소설, 19개의 산문, 3개의 발문, 20개의 기, 21개의 서간문, 5개의 비문,
4개의 추도문, 2개의 논설, 15개의 한시를 남겼다. 이곳에서 하나씩 골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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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요절한 천재 시인 우상 이언진
이 소설은 요절한 천재 시인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일본에 관백이 새로 들어섰다.
(제10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1761년(영조 37) 이때 청나라에서는
여러 속국의 섬들에서 남다른 재주를 갖춘 검객와 기이한 기예를 갖춘 사람과 서화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인사를 샅샅이 찾아내어, 도읍에 모아놓고 수년 동안 충분히
훈련시켰다. 그때 감히 우리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 왔는데 우상은
중국어 통역간으로서 사신을 수행했다. 그는 홀로 문장 실력으로 크게 명성을 떨쳐 그
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들이 모인 사람들에게 매번 시로 짓기 힘든 제목과
각운을 맞추기 힘든 운자를 내어 궁지에 몰려고 했다. 하지만 우상은 매번 창졸간에
즉석에서 읆어 대기를, 마치 진작에 지어 놓은 것을 외우듯이 하였다.
우상은 일개 통역관이었다. 그래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명성이 제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사대부들은 그의 얼굴도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명성이 바다
(일본 – 그때 만났던 일본인들에 의해) 너머 만 리 밖의 나라를 뒤흔들고,
몸소 곤어와 고래와 용과 악어의 소굴까지 다 뒤졌다. 햇빛과 달빛으로 씻은
듯이 기개를 떨치었다. 그러므로 주역에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한 것이다. 우상이 승본해를 통과하며
지은 시는 이러하다.
왜놈은 맨발에다 몰골조차 괴상한데
새파란 위도로는 등에 별과 달을 그렸네
꽃무늬 적삼 입은 왜년 문밖으로 달려나오느라
머리도 채 못 빗고 머리털을 동여 맸네
어린애가 등을 토닥이자 울음소리 잦아드네
이윽고 북 울리며 우리 사신이 들어오니
수 많은 눈들이 둘러싸고 활불인 양 여기네
왜놈 관리 무릎 꿇고 절하며 보물 바치는데
산호랑 대패를 소반 받쳐 내오네
주인과 손님이 늘어섰으나 실로 벙어리인 양
눈 짓으로 말 통하고 붓끝으로 얘기하네
왜놈의 관청에도 정원 풍취 풍부하여
종려나무 푸른 귤이 뜨락에 가득찼네
우상은 늘 자신을 남다르게 여겼다. 병이 위독하여 죽게되자, 그동안 써 놓은 원고들을 모조리 불태위면서
‘누가 나를 다시 알아주랴?”하였다. 연암은 생전에 우상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늘 한스러워했다.
게다가 그의 문장까지 불태워 버려서 남은 것이 없어 상자속에 오래 전에 간수해 놓았던 것들을 뒤져
겨우 몇 편 건져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스물일곱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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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 벗이란 제이의 나다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천년 전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고 주장하는데 옛 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는데, 누가 장차 ‘제이의 나’가 될 것인가? 누가 답답하게
천년이나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리석게도 천년이나 뒤 시대를 굼뜨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연암은 청나라 사람 곽집환의 시집에 연암이 서문을 지어주어서 교분을 갖게됐다.
서문을 쓰면서 연암은 곽집환의 시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을 마구 흘렸다고 한다.
벗이야 말로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한다면서 서로 만나 볼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연암은 그의 시를 이렇게 찬탄했다.
“봉규(곽집환)의 시는 훌륭하다. 장편 시는 소호 풍악이 일어나듯 하고, 짧은 시들은 옥이
부딪치듯 맑게 울린다. 시가 차분하고 기품이 있으며 따뜻하고 우아함은 낙수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깊이 있고 쓸쓸함은 동정호의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아아!
언어는 비록 다르나 문자는 똑같으니, 그가 시에서 즐거워하고 웃고 슬퍼하고 우는 것은
통역을 안 해도 바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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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조선 최고의 문장가 간서치(책에미친 바보) 이덕무의 시에 대해 갈파한 글이다.
이덕무는 옛사람의 시를 본 받지 아니하고 그와 비슷한 점도 없이 독창적인 시를 지었다.
연암은 이덕무가 저속한 촌티를 편안히 여기고 자질구레한 당시 풍속을 즐기는
시를 짓는 시인들과 같지 아니함을 매우 높이샀다. 이덕무는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주도했다. 조선사람이 글 짓는 법을 중국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나라,
당나라에서 답습하여 그 내용이 비슷하면 할수록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따름
이라고 꾸짓는다.
“우리나라가 비록 천하의 동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으나, 천승지국(제후가 다스리는 나라)
에 속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 이래로 비록 검박하긴 했어도 민간에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따라서 우리말을 한자로 적고 우리 민요를 한시로 표현하기만 하면, 저절고 문장이
이루어지고 그속에 오묘한 이치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남의 것을 빌려오지않고 차분히
현재에 임하면, 눈앞의 삼라만상과 마주 대하는 시를 탄생 시킬 수 있다.
각 나라에 산천초목, 짐승과 벌레가 다 다르니 우리의 풍토와 풍속대로 시를 짓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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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문 : 글은 홀로 쓰는 것
보내주신 문편(책으로 엮은 글)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은 뒤 무릎 끓고 정중히 일고
나서 말씀드리오.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으나, 사물의 명칭에 빌려 온 것들이 많고
인용한 전거들이 적절히 못하니 그 점이 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해 아뢰는 바요.
문장을 짓는 데에는 법도가 있소.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에게 증거가 있고, 장사치가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지요. 아무리 말의 조리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어찌 승리를 거둘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글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오.
<대학>은 성인이 짓고 현인이 이를 이어받아 서술한 것이니, 그보다 더 미더울 게 없소.
그런데도 “<강고>에 이르기를 ‘능히 덕을 밝히시다’ 하였다”라고 하였소.
벼슬 이름이나 지명은 남의 나라 것을 빌려 써서는 안되오. 땔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친다면, 하루 종일 길에 다녀도 땔나무 한 다발 팔지 못할 것이오.
그러므로 글 짓는 사람은 아무리 명칭이 지저분해도 이를 꺼리지 말고 아무리 실상이
속되어도 이를 숨기지 말아야 하오. 맹자가 이르기를, “성은 같이 쓰지만,
이름은 홀로 쓰는 것이다.”라고 했소. 그러니 또한
“문자는 같이 쓰지만, 글은 홀로 쓰는 것이다.” 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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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농삿집 풍경
노인은 참새 쫓느라 남녘 둑에 앉았는데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에 노란 참새 매달렸네
큰아들 작은아들 무두 다 들일 나가
농삿집 진종일 대낮에도 사립문 닫겼구나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다가 빗나가니
박꽃 울타리에서 뭇 닭이 꼬꼬댁거리네
들밥 광주리 인 젊은 아낙 주춤주춤 시내 건너고
깨벗은 아이랑 누렁이가 쫄래쫄래 따라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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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여름밤의 음악회
스무이튿 날 국옹과 함께 걸어서 담헌(홍대용)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곡조를 맞추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가곡을 불렀다.
(당시 민간에서 가곡을 부를 때 그 반주 음악으로 세악이라하여 거문고, 가야금, 피리
등으로 편성된 실내악을 사용하였다.)
** 담헌의 집은 한양 남산 밑 영희전 근처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라는 정원에서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니, 줄에서
울리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가 장신을 내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을 돈오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이 한창
가곡을 부를 때는 옷을 훨훨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 하였다.
매탕(이덕무)이 전에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모습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듯하고 재빨리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하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해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 연(연익성)과
함께 거문고 연주에 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았다. 천둥이 한번 치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듯 하였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더러,
“이것이 무슨 소리에 속하겠는가?”
하고 묻고 나서, 마침내 거문고를 끌어당겨 천둥 소리와 곡조를 맞추었다.
이에 나도 천뢰조(天言操)를 지었다.
**천뢰 조 (天言操): 하늘의 우레 곡조 라는 뜻. 악기 소리 와 자연 소리를 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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