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딸네 집 방문을 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책 한권을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 에세이 ‘사랑의 풍경’이다. 지중해를 물들인 아홉가지 러브 스토리, 그 첫번째가 이탈리아

중부의 대국이었던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비가 직접 쓴 ‘대공비 비앙카 카펠로의 회상’이다. 대공비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의 위험까지 감내하면서 결혼했으나 부부가 된 이후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사랑도 힘없이 무너져 갔다.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울타리는 가지고 있었지만

둘 다 새로운 사랑에 몰입하게 되었고 결론은 모두 다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나머지 얘기들도 모두

슬프거나 비참한 사랑의 말로로 장식되어 있다. 세상에는 이런 가슴아픈 얘기가 끝없이 많다.

 

4박5일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집에서 저녁을 해 먹기가 어중간해서 마중나온 벗들과 함께 중국식당에 갔다.

식사가 끝나면 의례히 가져다 주는 행운의 과자가 있는데 그 날 별 뜻없이 종이를 펼쳐보니 ‘Love’라는 단어가 셋 이나

들어있다. 곁에서 함께 식사하던 한 친구가 나를 쳐다보며 “사랑은 꼭 따라다니네.” 한다.

 

내 인생수첩에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 가고 싶다.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그 사랑때문에

시름시름 앓기도 여러번 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것 같았지만 소멸의 시간이 다가오면사 내가 보내지 않아도

한 동이 눈물을 남겨주고 소리없이 떠나간다. 이럴때마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한 동안 허우적거리다 겨우 다시

힘을 얻어 일어서곤 한다. ‘이제는 사랑 같은 것에 마음 뺏기고 싶지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마음을 다잡곤

하지만 슬그머니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에 지난 고통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봄처녀의 부푼 가슴이 된다.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사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첫 눈에 반하는 시간은 10만분의 15초,

대화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90초, 사랑의 지속적인 시간은 900일 이라고 한다. 사랑의 우물에 풍덩

빠지게 되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나와서 모든 일이 즐겁고 원기왕성하여 하는 일이 잘 돌아간다.

이것은 영원히 나오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점점 줄어든다. 그 이후로는 이성적 판단을 주관하는 전두엽이라는

물질이 나오는데 눈의 콩깍지가 서서히 물러가는 시간이다. 사랑의 유통기간이 끝난 다음에는 힘든 싸움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인내를 가지고 유통기간을 늘릴 수 있는 노력이 단연 필요하다. 부부들의 어려움이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젊었을 때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환경을 초월할 수 있을 것 같으나 나이가 들수록 앞 뒤를 따져보고 앉고

서는 자리를 가리게 된다. 사랑을 하게 되면 온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감으로 충만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랑도 서서히 식어간다. 사랑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감정은 어디다 저장 잡혔는지 

상대의 단점만 속속들이 눈에 들어온다.

 

결혼 이라는 통 속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도가

한 인간의 삶을 꼼짝 못하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세기의 인기배우였던 에리자베스 테일러는 여덟번의

결혼식을 가졌었는데 이런 유통기간을 잘 이용하면서 황홀한 사랑속에 산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 끊어지지

않은 열열한 사랑이 있었기에 뭇사람의 사랑을 받는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유통 기간이 평균 삼 년이라고 말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사랑의 기한을 무기한으로 정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내 사랑의 자리 유통기간은 없다. “사랑이여 어서달려 오너라. 너의 빈자리를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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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과일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저녁에 손님 두 분이 다녀가셨고 내일은 밴쿠버 친구가 아욱국을 먹으러 옵니다.

잘 대접하려고 합니다. 소중한 나의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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