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land's Story

아일랜드 이야기 1545 – 눈물도 아껴라

2016.01.29 00:35:35 (*.69.3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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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 중 가수 조용필은 조영남으로 고칩니다. 밤에 졸면서 쓰다보니 이름을

바꿔버렸습니다. 그래도 가수와 성은 맞았으니 용서가 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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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엄마의 얘기를 조금 더 하고자 한다.

위로 언니 오빠들은 아버지가 명주 공장을 운영 하신 것을 기억하고 뻔데기 먹던

얘기들을 하지만 집안이 다 망한 후에 태어난 나는 그런 추억이 하나도 없다.

내가 중학교 2 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버지 얼굴을 지금 그릴 수

없다. 그동안 어디에서 살으셨는지 몰라도 돌아가시기 3 년 전에 병들어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가족 아무도 나이어린 내게 아버지의 방랑에대해 말 해 주지 않았고 또 구태어

알아내고 싶지도 않다.  아버지는 혹한이 몰아치는 12월에 돌아가셨다.

이 때 내 생에 처음으로 가족의 죽음을 접하게 됐다. 화장터에서 아버지 재를 담아 나오는데

나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떠나 보내서 우는 눈물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 그리고 우리 남은 자식들이 고생스럽게 살아온 것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때문에 슬퍼서 울었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춥고 입은 옷도 얇아서 내 울음은

더욱 더 진했다.

명절이되면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지 않았음에도 엄마는 그 긴 완행 열차를 타고 우리 고향으로

내려가 시부모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옵고 오셨다. 선물이라야 겨우 고무신 한 켤레 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나이의 여자라라면 슬피 울면서 곁에 시부모를 모시고 연명하면서 살아갔겠지만

엄마는 자식들 교육시켜야 한다며 부산으로 내려와서 모진 고생을 다 하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연필 한 자루 사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엄마의 몫이였다.

그런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통 아낙네 같으면 그래도 자식 낳은 남편인데 이 설음 저 설음에 겨워 펑펑 땅을치고

통곡을 했어야만 했거늘 엄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내게 말 해주셨다.

“울지마라. 눈물을 아껴라. 이 죽음에 우리들의 눈물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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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8 Mo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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