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캐나다 땅에 발을 붙인지 꼭 40년 되는 날이다.
1976년 3월23일 김포공항에 나온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제 어쩌면 평생
못 보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었다. 물론 고국을 떠나가는 나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그때는 그만큼 비행기를 타고 타국에 나가는 일이 어려웠고 돈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화 인사도 명절에 겨우 1~2분 정도 밖에 못 했다.
“잘 있나? 잘 있다. 그러면 끊자. 전화요금 많이 나간다.”
당시 이민온 사람들은 모두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에드먼턴 공항에 착륙하려는데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정경이 하얀 눈 뿐이었다. 도시는 온통 눈 속에 잠겨있고 매서운 겨울 바람이 씽씽 불던
그 첫 날을 잊지 못 한다.
한국이 너무 가난했던 그 시절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겨우 일 인 당 800불이었다.
두 사람 다 한 달 안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어린 아이 둘과 눈 속에서 굶어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속에서 매일 직장 구하러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한국에서 일 한 곳이 영어를 쓰는 곳이어서 조금 영어를 구사 한다고 생각했지만
영국식 발음 (매우 굴린다.)인 이곳 캐나다인의 영어는 내 귀를 막아 버렸다.
직장에가서 application 쓰는 것 조차 쉽지 않았고 인터뷰를 하면 Yes 와 No를
잘 못 말 할 까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어떻게 사 십 년이 이렇게 훌쩍 넘어갔을까?
그때 네 살이던 딸아이는 다음 주에 마흔 네 살이 된다.
여섯 살이던 아들은 아버지가 되었고 나는 자연히 할머니가 됐다.
도저히 넘어가지 못 할 것 같은 어려움을 당 할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 할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죽는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힘듬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 처럼 돈 없이 이민와서 모진 고생을 다 한 경우가 있고
돈은 많지만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마음 고생도 그에 못지 않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다 살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무서워하지말고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어는 듯 내 나이에 이른다.
사는것이 쉬우면 사는 것이 아니다. 고민하고 울고 미워하고 화 내면서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다. 다 이루고 나면 가는 길 만 남아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할 사명이
끝나면 하늘에서 부르기 때문이다.
“고생하고 계십니까?
감사하십시오.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겁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함께 살던 아이들 아빠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40년을 기념하며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해바라기는 내일 오타와로시집갑니다.
이 것을 그릴때 부터 찜 해 놓으신 분이 구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바라기 네 송이 손질 했습니다.
무우 파는 모녀도 조금 더 손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