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옛날 이민와서 힘들게 살던 얘기들을 한다.
내 나라 아닌곳에서 뿌리 내리려면 그 뿌리가 새싹도 아니고 다 큰 나무를
옮겨온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여간 힘들지 않다.
딸과 얘기하다보면 언제나 그 옛날 어려웠던 시절얘기가 나온다.
바지 하나로 일 년동안 입었던 자기 얘기로부터
브라 하나로 버티던 내 얘기도 어김없이 나온다.
자전거를 못 사줘서 내년에 그리고 또 내년에 여러차례 내년을 울거먹었기
때문에 요즈음도 딸아이는 가끔씩 소리를 높여 “Mommm, next year!!” 라고
소리치며 나를 골려먹는다. 이런 전화를 받는 나는 무조건 “미안미안 으흐흐흐”
라 대답하고 딸아이도 까르르 웃는다.
밤에 눈이오니까 옛날 애드먼턴으로 이민 보따리를 풀때 생각이 난다.
1976년 3월23일 에드먼턴 공항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동네는 온통 하얗다.
오기전에 이곳이 매우 춥다는 얘기를 듣고 두꺼운 파카를 입고 오기는 했지만
온 동네가 흰 눈 속에 잠겨있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뼛속까지 덜덜 떨던
첫날은 내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직장을 구하러 하루종일 버스를타고 눈 속을 헤매었고 직장에 시험보러 들어가서
리셉션이 건내 주는 이력서를 쓰는데도 사전을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적어낼 수
있었다. 대체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Yes” 로 대답해야하나? 아니면 “No”로?
이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 때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이것이었다.
“아, 영어로 솰라솰라 척척 말을 잘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느것도 부럽지 않겠다.”
자나깨나 영어 귓 문이 트이기를 간절히 갈망했다. 단어와 숙어를 외우고 이들이 잘쓰는
슬랭도 열심히 적어 외우면서 살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영어는 아직도 나의
절친한 친구는 아닌 듯 하다. 일 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하니 감사할 뿐이다.
어느 젊은이를 어제 만났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한국을 다니러 간다고 말한다.
아이들 방학이라 한 이 주 동안 간다고 말 한다. 이민 온지 일 년도 안된 가정이다.
나는 칠 년 만에 카드를 긁고 한국 한 번 다녀오고 40년동안 그 이후에도 딱 두 번
밖에 다녀오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양호 한 편.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이 십 년 만에
다녀 온 사람도 있고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평생 못 가보다가 죽기 임박해서
다녀온 분도 있다.
세월이 많이 바뀌어 이런 젊은이의 얘기를 들으면 이민자의 고단함도 이제는 한 낱
옛 이야기로만 들려질 것이다. 고국의 그리움 때문에 가슴 메이며 울던 우리 이민시대의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뿌리 못 내려 절절매던 나무는 어느듯
고목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