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추운데 따뜻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우리 모두 고생 많이 했는데 지금이라도 잘 누리기 바란다.”
엘에이 언니의 카톡이다.
우리 칠 남매 중 네 사람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 셋 남았지만
한국에 있는 왕 언니는 팔순을 넘기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어느때 또
우리곁을 떠나 가갈련지 알 수 없다.
요즈음 빅토리아는 정말 칼 바람이 불고있다.
샵에서는 더워서 반 소매 입고 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섭씨 21도로
언제나 훈훈하니 그져 감사 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추운 날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와 노천에서 함께
고생하던 시절이 떠 올라 엄마 생각을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저녁에 나와 가장 가까이살고있는 엘에이 언니의 메시지를 받으면서
옛날 얘기를 조금 주고 받았다. 언니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였다고 한다.
엄마와 함께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는데 (나는 이 일은 전혀 몰랐던 일이다.)
어느 날 엄마가 엿 판을 언니에게 들려 주면서 팔아오라고 했단다.
그 날 하나도 못 팔고 들어왔다는데 그 날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단다.
언니는 약간 수줍음이 있는 성격이니 그랬을 것 같다. 만약 내가 엿 판을 들고
나갔다면 누구를 붙잡아서도그럭저럭 다 팔고 오지 않았나 싶다.
평소 나는 집에서 내가 가장 고생한 줄 알았는데 ‘푸 후 후~~’ 언니 말에 의하면
아무도 편하게 살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전쟁 후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했는가? 더우기 가장이 가족을 돌 보지 않은 집이란 말 할
필요가 없다.
위로 언니 오빠들이 살아있을 때 가족 사를 좀 더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서로 고생한 얘기도 듣고 즐거웠던 얘기도 들었을 텐데 내가 태어났을때는
그야말로 6.25 바로 이 년 후가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가 당했던 슬픔이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에 가시가 다른 사람의 염통 곪는 것 보다 더 아프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고통에 진심응로 잘 동참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언니의 ‘엿 장수’ 이야기~
과거에는 슬펐지만 어째 오늘 이 소식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 번진다.
나는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고 언니는 엿 상자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오늘, 하나님께 감사 기도 드리며 창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