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등에 보채는 아기가 매달려 있다.
육십이년전 쯤의 그 아기는 살아서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그랬단다. “막내 가시나 가만 안 나왔어도 지 애미 고생 덜했제~”라고
어릴 때 그런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참 함부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생각없이 내 뱉는 그 언어로 아이들은 감정 희생을 당하면서 살아간다.
엄마가 캐나다로 오시기 전 까지는 고운 옷 입은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오늘 엄마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혀드렸다. 다음날은 또 치마도 예쁘게
물들여 드릴 것 이다. 철 없던 아가는 다섯 살까지 엄마 젓을 먹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안하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일찍 죽는것은 아니다. 엄마의 고생을 생각하면
설흔 살도 못되어 돌아가셨을 텐데 설흔 여덟에 나를 낳고 구십 생신을 잘 대접받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돌아가시기 이 년 전부터 조용히 방에 누워만 계셨지 크게 아프지 않으셨다.
마지막 이 주 동안 병원에 계시면서 손수 몸에 걸쳐저 있는 호흡 줄들을다
제거 하고 “넉넉하다.”며 용감하게 떠나셨다.
다음 세상에 배우로 태어 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쯤 그 준비를 하고 계실까?
다시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평소에 못 했던 사랑한다는 말 해 드리고 싶다.
“엄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