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물학적 형제는 나와 언니 둘 남았다. 칠 형제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운명을 겪으면서 앞서들 떠나갔다.
큰 언니와 막내인 나는 거의 엄마와 딸 처럼 차이가 많다.
큰 언니는 팔순을 넘겼으니 거의 마무리 단계이고 그 중간 언니가
금년 칠십 삼세다.
어제는 캐나다 동부에 살고있는 딸 아이가 전화와서 “엄마 이모한테
전화 자주 해 주세요.”한다. 왜냐고 물으니 이모가 은퇴 후 많이 외로워
한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North America에서 엄마 형제는 이모 밖에 없지
않냐며 내게 이모 잘 보살펴 드리라고 주사를 꾹~ 놓으면서 전화를 끊는다.
아쭈~
나는 전화를 끊고나서 딸아이의 말을 곰씹어 보았다.
내가 너무 바쁘기는 하지만 사실 그 말이 맞다.
몇 십 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닐때였다.
그때 우리는 밴쿠버에 살고 있었는데 언니가 방문했다. 둘이서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모른다. 아침까지 이어진 우리들의 얘기는
딸 아이가 학교를 끝나고 집에 온 오후까지 이어졌다. 딸은 우리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머리가 헝크러진 채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기가 막히다며 문을 닫고 나간 적이있다.
물론 지금은 언니를 만나도 그렇게 수다를 떨 힘이 없어서 대충 얘기하고
잠 들어버린다. 수다도 젊었을 때 얘기다.
모든 조카들과 우리 형제들이 하나같이 다 화목 한 것을 자랑하고 싶다.
어느 누구와도 원수 진 것 없고 잘 사는 형제나 조카들은 형편이 어려운 다른
핏줄들을 돕고 살아간다.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이 비행기 표를 보내주고
가끔씩은 큰 수표도 오가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엄마의 핏줄이 이 처럼 아름답게
영글어지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서울에서 힘들게 근근이 살면서도 명절이면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 할머니 할아버지 일가친척 두루 고무신
한 켤레라도 선물하고 오는 모습을 해마다 눈으로 보아왔다.
돈이 많다고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짜게 사는 것도 아니다.
딸아이는 자기가 출장 갈때마다 회사에서 기름값으로 주는 돈이 75불씩 생기는데 이것을
몇 번 모아서 이모에게 서프라이즈 해 드리고 싶단다. 고마운 마음 딸아이에게서 느낀다.
딸아이 때문에 핏줄에대해 생각해 보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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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ville Park 몇 달전에 그리던 것인데 오늘 저녁에 손질 좀 했습니다.
사이즈가 커서 사진을 두개로 잘라 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