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중매한 아들 도리앤은 1975년에 한국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 나는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그 이후 서울 유엔 빌리지에서
살다 왔다. 도리앤의 아빠가 공군에 입대하여 한국으로 배속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 했듯이 나는 철없는 망아지처럼 이 남자를 좋아했고 겁없이 덜커덩
아기를 가졌다. 내가 아기를 지우려고 하자 신부님이 그것은 죄악이라고 나를
설득시켰으며 결국 나는 결혼식 없이 신부의 사인 한 장으로 결혼 신고만 하게됐다.
아이가 뱃 속에서 많이 자라 배가 불러오는데 그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아내를 데리고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우 당황했다. 나는 남편없이 혼자서
아이를 낳는것이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 곳에 손을 빌려 다행히 나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가게 됐다. 지금은 한국이 대 도시로 발전했지만
40년 전은 여러면에서 불편한 것이 많았던 시절이다. 다행히 가정부를 고용 할 수
있었고 여러 한국 사람들이 우리 내외를 많이 도와 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 가던 시절인데 가끔씩 내 지난 추억의
필름을 꺼내 보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살며서 열어본다.
금년 사십세가된 아들 도리언은 지금 미국 팔로스 버드에서 십 이년 연상의 여인과
십 삼년째 함께 살고 있다. 며느리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나이는 훌쩍 지난 오십 이세의
여자가 내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들의 장래에 대해 분해 하거나 나무랄 수
없기에 그가 조용히 살아 주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가끔씩 그 여자가 내 아들을 도로
데려다 주지 않는 것 만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도리언의 아빠가 아들로부터 만나기를 거부 당하고 내게 진실로 미안하다는
편지를 받게됐다. 그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로 만난 아내로 부터도 자기 남편이
많이 괴로워 하고 있다면서 용서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나는 지난 잘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용서 할 수 있겠는냐?
다 지난 일들 훌훌 털고 잊으라고 답 해 주었다. 나도 다른 사람 처럼 먹구름 같은
시절을 지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기에
한번 살아 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나는 이것을 명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삶은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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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씨의 작품 : 이 작품을 완성 하는데 오 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힘들지 않게 그린 것 같은 그림도 작가는 이 속에
혼을 담기 위해 이 처럼 오랜 시간을 소요 하기도 합니다. 귀한 작품이 그녀의
부엌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