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희얀하다.
일상의 시간들이 매일 특별나지 않지만 밤중에 컴퓨터에 앉아 하루를 점검해 보면
반드시 쓸 거리가 머리에 떠오른다. 물론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대충 보내지 않는다.
내 눈은 상대방의 심장에 들어가 있을 때도 있고 곁에 스쳐가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귀울이다 보면 바람의 하소연도 때로는 들려온다.
낮에 함께 일하는 Ruth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 아주 어릴때 첫 기억이 무엇이니?”
그녀는 찜찜 끙끙 거리더니 “아, 그것”한다.
“뭔데?”
“언니와 오빠가 나를 가운데 두고 옆집 피넛츠 버터 공장에가서 피넛츠 버터를
사온 것이요. 필리핀에는 작은 구멍가게들이 많아요. 여러 아시아 문화가 비슷하겠지만요.
우리집 병을 가져가서 피텃츠 버터를 담아오곤 했어요.”
“응 그래? 그러도 넌 좋은 기억이 있네. 난 아닌데.”
“뭔데요?” 그녀가 내 곁으로 바싹 다가오면서 내 얼굴을 응시한다.
“난 말야 아마도 서 너 살쯤 됐겠지? 한 참 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 같으니까.
밖에서 뛰 놀다가 집 안으로 들어와 댓돌위에 신발을 벗어놓고 방에 들어갔는데
내가 신발을 가지런히 안 벗고 휘딱 벗어놓고 들어간 모양이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 뒤통수에서 엄마의 불 호령 소리가 났어. 나는 어디서 천둥이 치는가 했지.
“신발을 왜 이렇게 엉망으로 벗어 재끼고 들어갔노” (글에 소리가 안 나는 것이 유감이다.)
엄마가 얼마나 무섭게 나를 책망하는지 난 어리둥절했지. 뭐가 잘 못 된인지도 모르는
아가였는데 말야. 엄마는 평소에 음성이 아주 컸었어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로.
그때 나는 아마도 겁에 질려있었지 않았나 싶어.”
지금도 나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와야 마음이 편한것을 보면 태어나서의 첫 기억
몹시 놀랬던 것 같다. 그것 뿐 아니다. 시집와서 시어머니 하얀 고무신을 매일 잘 닦아
드렸고 우리집에 놀러온 모든 분들의 고무신은 내가 백옥으로 만들어 드린 것 같다.
놀러온 사람들은 방에서 까르르 깔깔 신나게 놀다 집으로 돌아갈때 자기 신발을
신으려하다가 “읍스” “어머나 내 신발 새것 됐네”등등 감탄을 하곤했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부지런하다고 말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잠재의식속에
신발을 잘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뿌리 박혀버린 것 같아서 약간은 억울하다.
요즈음 이원복교수의 ‘새로나온 먼나라 이웃나라’ 중 일본편을 읽고 있는데
저녁에 이 책을 보면서 “어머나 어거였구나…” 무릅을 치는 일이 일어났다.
엄마는 일본에서 좀 계셨다는데 해방되고 외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 한국에
들어오셨다고 들었다. 일본식 교육에 신발도 아무렇게나 벗어 놓으면 안되는 것이
들어있는 것을 읽으면서 엄마가 왜 내게 그렇게 호되게 나무랐는지 이제 조금
이해가 간다. 조용히 곰살스럽게 타이르듯 말 해 주었어도 나는 잘 따라 했을텐데
엄마의 무지한 교육 방법때문에 이 나이에도 신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도 우리집에서 잠 자고 가는 식객이나 벗들 혹은 아는 분들의 구두에
먼지가 쌓여있으면 신발장 곁에 있는 구두약 통을 얼른꺼내서 목장갑을 끼고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놓는다. 이것 참 못말리는 내 억지 취미라고 말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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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교수의 새로만든 –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 중 Page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