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너무 밀착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아닌데…” 하면서 속으로 염려가 된다.
우리는 태어 나면서부터 가족과 연대되어 죽을때 까지 뗄레야 떨수 없는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 친구나 애인 혹은 정다웠던 이웃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떠날 수도
있지만 핏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나는 어렸을때 엄마나 위 언니나 오빠들 가운데 어린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어리다고 함부로 다루는 행위를 할 때 다짐 한 것이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저런 사람이 되지 않으리.”
결혼해서 시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나 생각 많이하여 늘 우리와 함께 살아왔던 일을
당하면서 다짐 한 것이 있었다.
“나는 절대로 장성한 아들 곁을 서성이지 않으리.”
아들이 대학을 들어가고 부터 내 마음은 이미 아들 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내 마음 깊숙히 예정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었다.
그 흔한 기숙사 한번 찾아가 보지 않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은 UBC를 다녔기 때문에 방문을 할 법도 했지만 그렇게 안 했다.
음식을 해다주고 옷을 세탁해 주는 법도 물론 없었다.
간혹 생각해 본다. 아들은 나를 무심한 엄마라고 생각 했을까?
금년 6월 말 경에 미국 워싱턴주에 올드 에이지 연금 관계로 내려 간 적이 있었다.
연휴가 끼어있었던 관계로 국경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 먹어 소셜 오피스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호텔에서 하룻 밤 잠을 자고 다음 날 일을 마치긴 했지만 호텔과 아들집은 한 시간도
못 되는 거리에 있었다. 아들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가서 하룻 밤 자고 가야겠다고
말 할 수도 있었겠지만 예약없이 갑자기 시어머니가 나타나면 며늘 아이가 당황 할 것이고
아들은 혹시 난처하지나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제 조금씩 나의 남은 날들은 줄어들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 순간이라도 가족에게 마음의 무거운 짐을 안겨 주고 싶지 않다.
딸아이가 출장차 밴쿠버로 온다. 딸을 만나기 위해 나도 밴쿠버로 나가는데
딸아이가 전해주는 말이 며늘 아이가 내가 밴쿠버 온다니까 손녀를 데리고
나를 보러 온다고 한다. 참 고마운 며늘 아니다. 삼 일 동안 손녀의 옷 두 벌을
만들었는데 실은 크리스마스에 전해주려고 했는데 더 빨리 전해주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다.
어제 혼자 중얼거렸던 소원이 하룻 만에 이루어 지다니.
며늘 아이는 자기의 도리를 최선을 다해 내게 해 주고 있다. 그 많은 회사일을
감당하면서 이 처럼 간간이 내게도 콩 고물을 떨어뜨려주고 있다.
내 아들이 엄마인 나를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로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들을 멀리하니 며늘 아이가 가까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