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아는분의 소개로 제일교포를 알게되었다.
오사카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나를 만나러 왔다. 아기처럼 순진한 사람이었고 부모가
방직 공장을 하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1967년대의 일이었으니
까마득한 옛 시절 얘기다. 데이트라해야 고작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공원을 거니는 것이었지만 그것 만으로 가슴이 덜덜
떨리곤 했다.
어느 날 차를 마시고 그가 차값을 내려고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여는데 고액권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나는 돈 그 지갑을 본 이후로 그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일부러 돈 많은 지갑을 내 보인것도 아니었고 나쁜 사람은
더더욱 아이었음에도 말이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그의 부모들이 내 사진을 보여주니 참 한 아가씨?
같다면서 일본에 한번 다녀 가라고 말하더란다. 1970년 엑스포가
있던 해 그 남자가 정식으로 나를 초청한다고 연락이 왔다.
“오 마이 갓” 여자 혼자 어딜 남자집에 간단 말인가.
지독히 돈 없는 남자와 결혼하여 죽을 만큼 고생했고 결국은
그 돈 없음이 결혼을 갈라 놓기도 했다.
“돈이 없어도 마음만은…” 하는 아이들 아빠의 말에 귀가 솔깃 한
것은 단순히 내가 너무 어렸고
옛날에 부르던 동요 생각이 났었기 때문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그 때 우리는 최영장군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러왔던지.
지갑에 돈이 두둑한 남자가 일본으로 오라고 부를때
용기를 내어 가서 “아니요 아니요 기요 기요”하면서
슬그머니 주저앉았더라면 평생 고생 하지 않았을텐데.
살면서 가끔씩 그 청년 생각을 하곤 한다.
돈 없으면
교양도 없어지고
품위도 없어지고
착함도 다 없어진다.
돈 없으면 기죽고, 사람노릇 못하고, 치사해지고, 우울해지고
친구들도 슬금슬금 피하게되고, 평소에 돈 관리 못해서 저 꼴이라는
핀잔듣게된다.
옛날 사람들은 나물먹고 물마시고 초가 산간에서 살면, 집세 걱정,
전기 수도 걱정, 차 걱정, 자식 공부걱정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돈 없어도 대강 살 수 있었다.
최영장군도 요즈음 살아있는 사람이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터.
황금을 보기를 황금같이 보아야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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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정원 사과나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