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민온 1976년도에는 한국정부에서 본인 재산도 못 가져
나가게 했기 때문에 이민가방만 달랑 들고 캐나다에 당도했다.
이민 삼 년 째 되는 해였다. 평소 잘 알고 있던 남자분이 자기는 영어는 못 하지만
자동차 고치는 기술이 있다고 하면서 영어하는 사람과 함께 주유소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우리도 마침 무엇인가를 해야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좋게 받아들여
남자 둘이 주유소가 낀 거라지를 시작했다.
막상 함께 일을 해보니 기술 있다고 한 사람은 한국에서 자동차 조수
정도의 일 밖에 안 한 사람이어 아이들 아빠는 난감해 했다.
그러니 둘 다 자동차 고치는 기술이 없는 상태였다. 주유소가 있었지만
당시 인구도 얼마 안되는 밴쿠버 변두리에 주유소의 적은 수입으로는
두 가족이 살아 가기에는 턱도 없었다.
소리는 들을 수는 없지만 아침에 아이들 아빠는 이런 기도를 올리고 집을
나가는 듯 했다. “주여, 오늘 손님이 오지 않게 해 주소서.”
저녁에 집에오면 손님이 두고간 고쳐야 할 자동차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자동차가 거라지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날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요즈음처럼 컴퓨터로 고장을 잡아내는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두 남자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날 저녁이었다. 아이들 아빠가 몰고온 우리 자동차 한 쪽이
푹 파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래 사고났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란다.
아이들 아빠는 세심한 사람인데 함께 일 하는 분은 성질이 급하고
일 이 잘 안되면 망치로 어디든지 팍팍 두드리는 나쁜 버릇이 있단다.
그 날 그 망치 든 손이 잘못 손님차를 치게되었단다. 두 남자는 너무 놀래
손님 자동차의 damage 부분을 물어줄 생각을하니 하늘이 노랬단다.
그런데 궁 하면 통 한다고 했던가 아이들 아빠가 넋을잃고
책상에 앉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자동차가 우리 자동차와 꼭 같은 회사에
색깔마져 같더라고 한다.
세상에…
그 일로 우리 새 차는 망가진채로 끌고 다녔지만 손님한테 complain 받지않고
위기를 넘기게 되어 모두들 다행으로 여겼다.
돈도 못 벌고 고생만 잔뜩하던 그 시절, 이제는 추억의 한 토막으로 남아있다.
그 모든 일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밑 거름이 되어 주었음을 감사하며
온 식구가 건강하게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축복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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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꽃들은 어김없이 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