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3월23일
김포 공항에서 나리타 공항을 거쳐 앨버타주 에드먼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신문을 보면서 Secretary모집을 눈 여겨 보았다.
내게 적당한 직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영어가 서툴어 본인의 전공을 살린 직장을 못 구했다. 그나마
여자들은 GWG 청바지 공장으로 남자들은 Welding(용접) 공장으로 직장이
열려있었다. 거의가 대학 출신 자 들이었는데 안 해보던 일을 하면서
집에와서는 서러워 많이들 울었다.
나는 절대로 GWG청바지 공장에는 가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눈이 6개월동안 오는 앨버타주, 3월은 아직도
혹독한 추위다. 추운 겨울에는 영하 40~50도 까지도 내려간다.
덜덜 떨면서 파카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버스를 타고
직장 인터뷰를 다니면 하루에 두 군데가면 잘 간다.
당시 500 Agent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Secretary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시험을 보는 곳이다. 이곳에서 세 가지의 시험(영어단어 / 타이핑 / 인터뷰)을
통과하면 여러 곳의 직장에 인터뷰 갈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단어시험과 타이핑은 아주 좋은 성적이었는데 회화 능력은
영~~ 시원찮았던 엘리샤. 그러나 어찌어찌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하여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사무실로가서 파트타임을 하게되었다.
일 하는 첫날 내가 말을너무나 잘 못 알아들으니까 점심 시간에
보스가 오더니 집에 가라고 한다. 파트 타임이라도 어디냐고 신이나 있던
엘리샤 기가 팍 죽는 순간이다. 흠 흠 흠
나는 한국 직장에서 늘 최고의 능력자로 인정받아왔는데 영어 잘 못 한다고
일 하는 도중에 쫒겨나게 되었다. 시~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마음속으로 눈물이 비 오듯 했지만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고 보스에게
오늘 네 시간 일 한 것을 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네 시간 체크를 받아오면서
“내가 영어를 다잡아 공부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얼어 죽겠구나.”란 생각으로
집에오게 되었다. 우리가족은 한국 정부에서 허락한 머리수 당 8백불 즉
3천 2백불이 전부였다. 첫 달 아파트 세 + Damage Deposit + 아주 작은 자동차
Deposit 내고 나니까 딱 천 불 남았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엘리샤, 야코죽지 않는 엘리샤.
다시 500 Agent로 가서 다른 직장을 소개 받아 Alberta Hospital Association에
당당히 입사했다. 매일 출 퇴근길 버스길에 지나가는 간판들의 단어를 적어 집에
와서 외우며 공부했다. 내일 다시 지나갈 때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내 자신에게 벌점을 매기면서 체찍질 하던 엘리샤. 네 살 여섯 살의
두 아이들을 두고 밤에 영어 공부를 따로 하러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가치있는 눈물은 우리에게 성수로 대신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가운데 계시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내가 삶을 포기 하지 않는 한. 그 때 내가 쫒겨나지 않고 그럭저럭 직장 생활을
했다면 내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다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것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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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조금 더 손질 했습니다.
11″ x 14” Mixed on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