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보내온 글을 읽으면서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얼마 전 나온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자서전에 실린 사연을 읽고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백씨는 ‘서독 국비유학생 1호’로 1956년 겨울 비행기를 탔다.
▶지금과 달리 나흘이나 가야 프랑크푸르트에 닿는 여정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다해서 15달러. 독일 가서 자리 잡는 데 쓸 돈이었다.
홍콩 가는 비행기가 뜨자 스튜어디스가 기내식을 가져왔다.
백씨는 배가 고팠지만 겁부터 났다. “저 밥은 얼마일까?”
그는 안 먹는다는 뜻으로 “노 생스(No Thanks)” 했다. 홍콩서 1달러 주고 바나나를 한 아름 샀다.
방콕을 갈 때도, 뉴델리·베이루트·로마를 갈 때도 음식이 나왔지만 백씨는 계속 “노 생스” 했다.
그때마다 바나나로 버텼다. 마침내 베이루트에서 배탈이 났다.
기내식이 공짜라는 걸 안 것은 독일에 도착해서였다.>
어디 그 분 뿐이었으랴. 나 처럼 옛날에 이민온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다.
내 경우 이민 막 온 1976년 그로서리 일주일 먹을 양 100불어치를 사면 카트에 넘치도록 그득하게 담겼다.
직원이 서비스를 받겠느냐고 물어오면 한사코 (No Thanks)를 외치면서
영하 40도의 매서운 칼 바람을 받으면서 자동차까지 카트를 끌고 갔었다. 차츰 이곳 생활이 익어가면서
가만히 보니 직원이 주는 번호를 받아가지고 나가서 내 자동차를 일정 지역으로 끌고가면
고생 안하고 직원들이 내가 산 물건들을 차곡차곡 잘 실어 주었는데 이 것을 안 것은
고생을 많이 하고 난 아주 한 참 후였다.
이곳 시스텀을 잘 알지 못하기도 했지만 잘 모르면 물어 봤어야 했는데 무슨놈의 필요없는
자존심을 끌고 다녔는지. 모르는 주제에 묻지도 않았으니 위 글의 백영훈 선생이나
나나 고생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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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을 들어서는 입구에 핀 베이지 장미꽃
정원에서 앞 다투어 피고있는 들꽃들.
호박이 맺히고 있습니다.
토마토에는 꽃들이 맺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