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시들어간다.
일주일 전 식탁위에 올려놓았던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그 사명을 다 하고 있다.
매일 변해가는 모습을 사진을 찍어 다시 보니 그 마르는 정도가 하루하루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숨결 같다. 꽃과 잎들이 비틀어지고 누렇고 푸르딩딩한 볼품없는 색깔로 변해간다.
이 어줍잖은 색깔은 내가 평소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나타내고 싶은 색상들이다. 덩치 큰 꽃들이 적당이 토라지고
어느 놈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살포시 휘어진 잎들까지 완벽한 구도다. 정물화를 그리려면 여러 가지 소재를 놓고
구도 잡는 일이 만만치 않은데 물기마른 꽃들이 완벽한 구도로 내 그림의 소재가 되어주다니. 한여름인 6월,
장대키를 뽐내며 계속 피고 지는 해바라기가 마당 앞뒤로 장성처럼 우뚝 서 집 지킴이처럼 당당하다. 한창 물오른
완벽한 꽃을 그리다보면 모두가 그렇고 그런 특별한 개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꽃송이가 한 잎도 흐트러지지 않고
반반하고 자신 만만한 천평일률적인 모습이라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말라가는 꽃들에서 클래식하며
로맨틱 한 모습을 발견한다. 해바라기 하면 환한 얼굴에 반듯한 꽃잎들이 전령사 같이 여겨왔지만 오늘 식탁위에 있는
해바라기 모습을 보니 그 은은한 기품에 숙연한 생각까지 든다.
시드는 해바라기는 마치 인고의 세월을 지난 노인의 심정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일본의 숲은 세계에서도 특수하게
조엽수림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숲의 냄새는 정말로 독특하며 그것은 쇠잔해 가는 낙엽의 채취라고 한다. 스러지는
낙엽은 새싹이 움틀 때 밑거름이 되어준다. 젊었을 때는 용기백배하여 고집과 아집으로 점철되던 사람도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도 숙여지고 이해와 관용의 폭이 넓어진다. 이것이 곧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빅토리아의 여름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적당히 덥고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이 살에 닿을
때 마다 그 상쾌한 기분에 으스스 전율을 느낀다. 여름 석양 또한 아름다움의 극치다. 창가에 기대서서 석양을 바라보면
언제나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하늘색 바탕에 갈색, 군청색, 보라색, 북청색, 밝은 회색 및 분홍색이 갖가지 모양의 흰
구름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성한 앙상블을 붓으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비가 살짝 뿌린 운 좋은
날은 무지개까지 겹친다. 아무리 바빠도 일몰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던 일을 내려놓고 즐긴다. 종일 떠 있는 태양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곧 기울어지는 석양은 모두들 좋아한다. 노을이 좀 더 오래 머물러 주길
간절히 원하지만 일순간에 소리 없이 꼴깍 산을 넘어갈 때는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긴 양 허전하고 야속하기 까지 하다.
그 때 나는 매일 시를 지었다. 가정이 깨어지고 죽을 것 같은 시련이 닥쳐왔지만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시를 지으면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호박잎 그리다 미소 지었고
호박꽃 그리다 함박 웃었네
석양하늘 그리다 울먹였고
여름 밤 그리다 끝내 큰 울음 터뜨렸네’
나도 맥도널드에서 시니어 커피를 마신다. 처음부터 노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정신의 완결을 위해서는
조락(凋落) 의 시기 또한 불가결한 것이다. 청년의 시기는 정신보다는 오히려 육적인 것, 자연적인 것 들이 가까이 있다.
나는 요즈음 늙음에 감사한다. 더 이상 이성이나 자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무엇이든지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불편한 모습도 대충 넘어간다. 시드는 해바라기가 절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나 초를 다투며
기우는 노을처럼 내 삶의 마지막이 더 아름답고 싶다. 예술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비로소
본래의 생명을 간직한다고 한다. 인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의 젊었을 때보다 늙어가는 모습이 초라하지 않도록
식탁위의 해바라기를 보며 배운다. 완벽한 것보다 기우는 것이 더 아름답다.
2014년 6월6일 ‘빅토리아 투데이’ 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