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이란 책과 근래에 읽은 ‘사랑의 풍경’에대해 입맛이 씁쓸하다. 그것은 그들의 종말이 모두 비극으로 끝 난것에대한 애처럼움 이랄까 아니면 특별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에대한 애석함이라고 말하겠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을 한번 말해보자.
*장병천과 절세 미녀 기생 강명화의 자살여행 1923년 – 11살에 한 평양 기생의 수양딸로 팔려감. 기생 수업 6년만에 춤과 소리에 있어 명무, 명가라고 칭찬을 받음. 당시 강명화는 절세의 미기, 최고의 재기, 최고의 가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류계에 그 이름을 날렸음. 김동인, 나도향, 현진건 같은 유명한 문인들도 그녀를 자주 찾았음. 명월관에서 열린 유학생의 송별연 자리에서 송별의 주인공 장병천을 만나 둘이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장병천은 동경유학도 포기하고 가던길을 되 돌아와 강명화와 동거시작. 거부 아버지 장길상과의 갈등. 사회의 끈임없는 지탄과 야유를 못 견디고 두 사람은 삶을 포기한다.
*윤심덕(조선 최고의 여류 성악가이자 연극배우)과 김우진(극작가, 목포 부호의 아들) – 현해탄 정사. 투신자살 1926년 – 조선 사람의 연락선 정사는 처음. 김우진은 가정을 가진남자였다. 김우진은 당시 와세다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이었는데 당시 아내와 이혼하고 윤심덕과 함께 하기에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 전직 간호원이었으며 후에 여급으로 일 한 김봉자(본명 김갑순)와 의사 노병운(기혼자)의 한강 투신자살 – 그들의 사랑을 알게된 아내의 고소로 인한 피 할 길이 없었음. 김봉자가 먼저 투신하고 며칠 수 노명운이 한강투신. ‘비련의 애화’
* 화가 나혜석과(화가, 조각각,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 운동가) 최린의 사랑 – 경성을 발칵 뒤 흔 든 이혼 고백장.
‘이혼의 동기와 원인을, 그 책임 문제로 나는 당신을 온전히 동정할 수 없음에 거듭 놀랬었고,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시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필요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입니다. – 나혜석씨에게 남편 김우영. 첫 사랑 최승구의 갑작스런 죽음. 그 이후 결혼에 이르지만 그는 전실 자식이있는 김우영이었다. 나혜석의 결혼 요구조건. 1 일생을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요.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3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주시오. 결혼 후 최린과의 불윤으로 이혼을 당함.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이 특선으로 뽑힘. **그녀는 “정조는 취미다.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느냐?”라고 항변. 고독과 가난 속에서 삶을 마치다.
** 김원주의 정조논쟁 – 정조는 결코 도덕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사랑을 백열화 시키는 연애 의식의 최고 절정이라 하겠습니다. 첫 번째 결혼 이혼. 두 번째 만난 일본남자에서 아들 하나 출산. 세 번째 시인 임장화와 동거. <부녀지광> <신여성>등에 여성 계몽에 관한 여러글을 게재. 임장화의 아버지가 둘의 관계를 알고 생활비 단절. 다시 절대적 사랑 백성욱과의 만남. 후에 일엽스님이 됨. 그녀는 세속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은 그녀를괴롭혔다.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한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것은그녀의 아들이었다. 14년 만에 만나게 된아들 마사오에게도 냉정하게 대했으며 자신은 어머니가 아닌 구도자의길을 가고있는 스님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들은 후에 화가가 된 후 어머니의성을 따라 이름을 김태신으로 고쳤다. 아들도 어머니의 뒤를이어 출가했다.
** 내일로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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