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정숙 – 조선의 콜론타이스트 : 상하이 유학을 떠나던 기차안에서 만난 임원근과 첫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들은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의 동지가 되어 일 하던 중 임원근이 첫 번째 감옥에 갇히고 만다. 허정숙은 1924년 동아 일보에 <여성 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 이라는 글을 발표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한때는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 기자 생활도 함께하여 “원앙 기자”라며 부러워들 했다. 다시 경찰에 의해 두 사람 검거됨. (공산당 활동이 이유). 허정숙은 바로 풀려났지만 남편 임원근은 나오지 못했음. 그런 가운데 허정숙이 송봉우과 관계를 가짐. 딸의 파다한 수설수에 스트레스를 받던 중 아버지(민족 변호사) 허헌씨는 딸을 미국으로 데리고 감. 이로서 임원근과의 이별이 옴. 이때 임원근의 절망적인 시를 적는다.
만날때 감정으론 /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르더니 / 어찌해 세상사 봄꿈같이 / 반도 못 간 길에 작별이 이루어졌네 / 만날때 감정으론 /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르더니 / 호사 한 건 사람마음 / 어찌어찌 하노라는 / 그대와의 굳은 맹세 모두 다 잃게됐네 / 사랑으로 만났던 님 / 사랑 식어 사라지니 / 낡은 도덕과 거짓 형식 / 두 사람을 매여 둘 힘이 없어 / 감각없는 손길같이 스르르 풀어졌네 / <임원근 – 옥중기 2>
두번째 만난 송병우와 아들까지 출산 (세 번 째아이)했으나 송병우가 전향하는 바람에 그와도 결별. 다시 세 번째 남자 최창익과 결혼. 11년 살고 다시 최창익의 요구로 이혼. 김원주나 나헤석같은 낭만주의 신 여성들과는 다르게 허정숙은 그런 악소문에 상처입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혁명가였다. 훗날 허정숙은 남편 재옥중 아내의 수절 문제를 묻는 삼천리 기자의 질문에 부부가 같은 동지인 경우에는 수절 문제가 더욱 복잡하고 심각하다며 출옥할 때까지 수절함이 원칙이나 경제 관계, 성 문제로 인해 끝까지 수절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는 북한정권이 수립된 이후 내각 각료인 문화선전상에 취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허정숙은 김일성 개인 숭배를 비판하는 옛 남편인 최창익을 거짓증인하게 된다. 이것은 그녀의 뜻은 아니였다. 최창익을 숙청하기위한 김일성파의 회유와 협박에의한 것이었는데 옛 남편을 앞에놓고 그들이 써온 <역사적인 죄악 폭로문>을 읽으면서 울었다고 한다. 허정숙은 비판 회의가 끝 난 후에도 계속 감옥에 갇혀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위해 전 남편을 사지로 몰아내었던 허정숙은 목숨은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이후 권력층에서 밀려났다가 몇 년 시간이 흐른 후 다시 1972년부터 조국전선 서기국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노동당 비서에 중용되면서 정권 15위에 오르기도 한다. 온갖 고난과 역경 자유연애와 여성 해방 사상을 몸소 실천해왔던 <붉은 연애의 투사>는 1991년 아흔 살로 생을 마감했다.
**콜론타이스트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1872년 3월 31일 ~ 1952년 3월 9일)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노동 운동가, 페미니스트 운동가, 정치인이자 외교관, 소설가, 사회주의자다.콜론타이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틀 안에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결혼과 연애, 성의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녀가 제시한 연애와 성, 결혼에 관한 새로운 도덕은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도 큰 논란을 야기하였다.[2] 한국의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 정칠성, 박정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는 《삼대의 사랑》, 《자매들》, 《붉은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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