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홍과 이재유, 그리고 김태준 :
이재유 : 마음에 없는 결혼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이었다. 당시 여인들이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멀리서 남편을 찾아왔건만 아내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와 가정은 운동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포기하게 만드는 굴레라고 여겼다. 그는 해방직전까지도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조직인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아내와 헤어진 이재유는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친구의 여동생 이순금(토로이카 멤버)과 3주간의 짧은 동거생활을 가진다. 여러번의 검거 그러나 그 만큼의 탈출을 계속하면서 이재유는 신출귀몰하게 일경의 추적을 잘 빠져 나간다. 그런데 한 번은 고문과 각기병으로 걷는 것 조차 힘들었는데 도망들어간 집이 하필이면 미국 영사관이었다. 러시아 영사관으로 들어가려다 잘못하여 미국 영사관으로 들다고 생각한 일경은 이재유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수한 매질과 욕설을 가했다. 이 일 후 그의 손에는 항상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매달고 허리에는 방울을 채워 놓았다. 여기서도 그는 기묘한 아이디어로 수갑을 풀고 탈출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끔. 다시 경찰의 추격을 받아야 했던 그는 일본인 미야케 교수집으로 들어가 그의 도움을 받는다. 일본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다시 탈출하게된 그는 ‘조선 공산 운동 사상의 일대 인물’로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박진홍 : 동덕여고보 재학 중에 ‘개교 이래 최고의 재원’으로 불렸고 한때 문학가로서의 길을 꿈꾸기도 한 여성. 4학년때 동맹 휴업을 주도하다 퇴학. 그 후 공장에 들어가 노동 운동을 할 정도로 열성적인 혁명가이기도 했다. 당시 ‘아지트 키퍼’라는 것이 있었다. 남자 혼자 방을 빌리면 의심을 받게되어 여자와 함께 부부라고 위장하고 방을 얻으면 의심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재유는 자신의 신변을 위해 박진홍에게 ‘아지트 키퍼’를 찾아달라고 말하니 그녀가 자신이 그 일을 맡아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박진홍도 몇 년 동안의 수감생활로 부모와의 대립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재유와 함께 하면서 서로 치유받는 입장이 됐다. 이때부터 모든 밖앝 연락망을 박진홍이 도맡아 다니게 된다. 함께 사상이 맞아 살게되니 정드는 것은 당연한 일. 얼마후 원하지 않은 임신도 함께 따라왔다. 여러 사건 이후 박진홍이 임신한 채로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배 부른 박진홍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감옥에 미리 들어와 있던 3개월동안의 연인 이순금이 이 사실을 알고 펄펄뛰었음. 이재유 이순금 그리고 박진홍의 삼각관계. 박진홍이 이재유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도 보살핌을 받지못해 한 살 반때 죽었다.
<어떠한 ‘로맨스’를 물론하고 그 ‘로맨스’의 그늘에는 언제나 ‘여성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주제가 되어있으며 어떠한 사건에든지 여자의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만큼 이번 이재유 사건에 관련해서도 이재유를 싸고도는 ‘삼인녀’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마못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재유가 1932년 말 출옥한 이후 반제 동맹 운동과 적색 노동조합 조직에 있어 교묘하게 이용을 한 여성으로 그 첫째가 이순금, 그 둘째가 박진홍, 그 셋째가 유순희의 세 사람이었다. * 단 유순희는 동거한 적이 없는 여성. <삼전된 페포 바통, 사상선상의 애욕화. 매일샌보 1937년 4월30일자>
전향을 거부한 이재유 감옥에서 죽음을 맞다. 이재유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3년에 만기가 됐으나 전향을 거부했고 일제는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해방을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26일 폐결핵을 앓던 그는 41세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박진홍은 1944년 10월9일 출소했다. 오랫동안의 수감 생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됐지만 박진홍은 출소하자마자 운동을 재개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때 김태준이라는 혁명가를 만나게된다. 경성제대 재학 시절에 동아일보에 <조선 소설사>라는 뛰어난 고전문학 연구 논문을 연재해 학계를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이로인해 이례적으로 1939년에 조선문학을 강의하는 경성제대 강사가 됨. 박진홍는 김태준을 만나 존경과 사랑으로 발전. 김태준의 수배령이 떨어져 두 사람은 중국 옌안으로 탈출하기로 결심. 김태준은 집과 가지고 있던 고서를 다 팔아 자금을 마련했고 여러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검문) 그 무시무시한 감시의 눈과 눈을 맞으며 사람들의 눈을피해 산을 기어오르면서 박진홍은 실신도 여러번 했다. 감옥에서 나온지 40일만에 행한 행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 1945년 4월에 예정했던 목적지 옌안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고국을 떠난지 거의 4개월만이다. 옌안에서 허정숙과 최창익이 속해있는 조선독립동맹의 우대를 받게된다. 그래 8월 조국의 독립을 맞아 어렵게 옌안을 찾아온 지 얼마되지 않다 다시 해방조국으로가야했다. 그때 박진홍은 임신중이었다.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는 르허성 람핀에서 아들을 낳았다.
남에서 사형당한 김태준, 북에서 숙청당한 박진홍 – 1948년 박진홍은 남조선노동당이 불법화돼 탄압이 극심해지자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그리고 9월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이 후 그녀의 행적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대적인 남로당파 숙청 때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박진홍과 헤저지고 남한에 남은 김태준은 남로당 문화부장을 맡아 문화 공작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 1949년 7월26일 서울시경에 체포됐다. 그는 공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향을 거부한 탓이다. 결국 그는 체포된 지 3개월 만에 수색의 군 처형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잔악한 일제 통치하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조국의 독립을 웅해 고통스러운 엔안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혁명가 부부는 분단된 조국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부의 사랑은 옌안에서 돌아와 김태준이 <문학>지에 투고해 남긴 <연안행>을 통해 ‘일제하 운동사상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로 전해지고 있다.
**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도 할 일을 다 하는구나~~, 일 벌리면 아이가 생겨나는데 우짤라고…쯧쯧’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은 죽음도 불사한다. 아니 가만보니 옛날 사람들이 정조 관념이 더욱더 없구먼. 우리때는 남자하고 잠 한 번 자면 내 일생 그것으로 땡~~~ 하고 살았는데 그 옛 옛날 사람들은 아주 신나게 모두들 자유연애자 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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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무리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