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를 물들인 아홉가지 러브스토리

대공비 비앙카 카펠로의 회상록 :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사랑만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친 한 여성의 이야기다. 비앙카의 엄마는 그녀가 여덟 살도 채 안되어서 죽었다. 그녀는 영광스러운 베니치아 공화국에서 몇 백 년 동안 공적을 쌓아온 카펠로 가에서 태어났고 베네치아 귀족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리면서 살아온 가문이다. 불행은 엄마가 일찍 죽은 후 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엄마가 죽고나서 역시 베네치아 귀족 중의 귀족인 그리마니 가문 출생의 계모가 들어와 비앙카와 동생을 멸시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절망에 빠져있던 비앙카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죽은 엄마의 친한 친구(베네치아 공국의 총독 안드레아 그리티의 여동생)로부터 명문가의 여성으로 익혀두어야 할 음악, 자수를 배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비서관을 지낸 분으로부터 라틴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녀를 공부 가르쳐주던 선생과 엄마의 친구가 차례 죽어간다. 불행의 파도는 계속 밀려와서 이제는 계모의 계략으로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그녀를 수도원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당시 수녀는 수녀원의 높은 담장 안쪽에서 여자로서 누릴 평범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다 죽어가야했다. 참으로 애절하고 암담한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미사에 참석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외출은 금지된 상태여서 그녀의 가슴은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때 구원의 손을 뻗은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이름은 피에트로였다. 일요일 미사석상에서 만난 이 남자를 사랑하게되어 둘이 위험을 무릅쓰고 베네치아를 도망나오게 된다. 집안의 추적을 피해 한겨울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피스토이아까지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한편 그녀의 가출에 분노한 카펠로 가에서는 함께 도망간 피에트로의 목에 현상금 금화 1천 두카토를 내 걸었다.

비앙카가 피에트로의 집에 도착해서 알게된것은 그가 귀족 집안 출신이라고는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공증인이었고 상상을 초월한 초라한 살림살이에 비앙카는 절망하게된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추격자가 피렌체까지 들어왔다면 그녀의 외출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밖앝 출입을 못하고 집안 내에서 쓸쓸하게 생활 하던 그녀에게 말을 타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한 귀공자를 창문을 통해 보게된다. 그는 다름아닌 토스카나의 대공 코시모의 아들인 프란체스코였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말 없이 창문을 통해 마음을 주고 받던 두 사람에게 어느날 프란체스코의 유모가 나타나 비앙카를 프란체스코 앞으로 데리고 간다.

남편이 있는 아내가 대공의 아들로부터 초청받은 것을 알게된 남편과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한다. (세상에 무슨 이런일이 다 있는지) 그 이유는 이 일로인해 프란체스코가 많은 재산을 피에트로 집으로 하사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편 피에트로도 남편있는 다른 여자와 정을 나누다 그쪽 남자들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한다.

홀로된 비앙카와 프란체스코가 너무나 진실하게 사랑하게된 햇수는 3년이다. 마음에는 없어도 프란체스코는 당시 유럽 전역에 성행해왔던 정략결혼을 하게된다. 신부는 독일 황제의 딸인 요하나였다. 프란체스코는 결혼은 했지만 비앙카 곁에서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나누어간다. 그녀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고 정식 결혼한 요하나에게도 딸 몇 명과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 하나가 있었지만 프란체스코는 늘 비앙카와 비앙카에게서 난 아들에게만 관심을 두게된다. 병약했던 아내 요하나는 일곱번째 아이를 가졌을때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던 중 계단에서 굴러 죽게된다. 대공비의 죽음으로 나라 전체가 1년동안 상복을 입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비앙카에게 쏟아진다.

“저 여자는 자기 남편을 죽인 여자다! / 메디치 가에 불행을 가져온 마녀다! / 임신했다고 속이고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사서 자기와 대공님 사이에 태어난 아이로 알게 한 악녀다!”

프란체스코는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내 요안나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비앙카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비앙카는 대공비가 된 것이다. 이로인해 비앙카의 친정인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도 과거는 다 잊은 듯 아버지와 남등생이 결혼에 참석한다.   8년동안 걸친대공비로서의 비앙카에 대한 평가는 대조적이다. 악평도 많았지만 한편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는 거의 모두가 긍정적이라고 한다. 대공비 시대의 비앙카는 정치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남편의 내조자이자 충실한 조언자로서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죽은 대공비의 아이들 양육에도 열심이었던 착한 아내로 평가받는다.

1587년 10월, 대공 부부는 피렌체 교외의 포조 아 카이아노의 별장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는데 대공이 말라리아에 걸려 심한 고열로 쓰러진다. 프란체스코는 죽어가면서도 동생 페르디난도 추기경에게 비앙카 대공비를 부탁한다는 말을 거푸 되뇌이며 유언을 했다.  동생인 추기경이 유언 집행자로 결정되었다. 곁에서 남편의 병을 안타깝게 간호하던 비앙카도 같은 병에 전염되어 프란체스코가 죽은지 12시간 만에 눈을 감는다.  추기경은 프란체스코의 유언을 완전 무시했고 대공의 관은 메디치 가의 묘소에 안치되었으나 대공비의 유해는 지금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려지지 않고있다.  새로운 대공이 된 동생 추기경은 유언을 완전히 무시했다. 비앙카의 아들은 메디치 가의 일원으로 대우 받기는 했지만, 상속도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했다. 역대 대공비 가운데 유일하게 대공비의 관을 쓴 초상화를 남기지 않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글 쓴이 시오노 나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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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예상했던 암행어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종일 서성이며 애인 기다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