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아들인 나 (야마오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서  나를 키우셨다. 나의 모든 생활과 인격을 지탱해준 어머니는 유년기에서 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은 좀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주말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창포꽃이 새겨진 시가라키야키 찻잔을 내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찻잔에 입을 대자마자 얼굴을 찡그리고, “냄새가 좀 나는데”라 말했다.

생선 요리를 먹고 나면 생선 지방이 식기에 달라붙고,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으면 그것이 부패해서, 다음 번 사용할 때 생선 비린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고, 그때는 아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 어머니에게 주의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특히 찻잔은 세제를 사용해서 박박 씻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어머니의 찻잔을 집어들고 코밑으로 가져가더니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넌 어떠니?”하며 찻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을 종종 경험해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찻잔을 내 코 앞으로 가져왔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냄새가 안 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주 조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차 맛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나 어머니는 나의 이 말을 듣고 이겼다는 듯이 “나이는 먹었어도 아직 미각이나 후각은 떨어지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아내는 잠시 그 말을 듣고 있더니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의 다기들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갑자기 오열을 터뜨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내가 행방을 알리지 않고 집을 나간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아내는 그 전날 찻잔의 냄새 일은 정말 소소한 일이었지만 그때까지 쌓여진 울적한 검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아내는 나갔지만 나는 아내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내의 친정을 포함하여 아내가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다녀보았다. 아무도 내게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내의 행방을 모른채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는 이제 집 나간 아내를 잊고 다른 여자를 맞으라고 채근한다. 4년이란 시간동안 아내를 그리는 마음은 조금씩 식어갔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내를 잃고 싶지는 않아서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내게 헌신적이었던 아내를 나의 우둔함 때문에 외톨이로 만들고 말았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직장은 구매로에 있었기 때문에 소토보와 도쿄의 거의 중간 지점인 소가에 내 집이 있다. 소가를 선택한 데는 게요센이 바다가 보이는 통근 전철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출발하면 한동안은 도쿄를 향한 진행 방향으로 왼쪽 창에 바다가 펼쳐진다. 전철에 앉을 자리가 있어도 바다를 보기위해 매일 서서 바다를 보며 다녔다. 이러던 중 어느날 전철 고장으로 전철안은 평소와 달리 복잡했고, 모든 차량에서 바다 쪽 자리는 커녕 손잡이도 잡을 수 없었다. 진행 방향을 향해 오른쪽 손잡이만 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육지를 향한 쪽의 손잡이를 잡고 섰다.

바다가 안 보이고 건물들이 빽빽한 쪽을 보면서 가던 이날, 나의 시선은 아파트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그 풍경 속에 전에 본 적이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아파트의 2층 베란다에 널어둔 비치 드레스였다. 대담한 하늘색의 비스듬한 격자 무늬가 옷 전체를 감싼 개성적인 디자인이었다. 4년 전에 집을 나간 아내 마코토도 그런 비치 드레스가 있었다. 둘이서 부티크에 들렀을 때, 하나밖에 없는 캘리포니아 수입품이라는 말을 듣고 산 것이다. 아내는 여름에 나와 함께 바다에 갈 때도 그것을 즐겨 입었다.

이 날 이후부터 나는 오른쪽을 향해 손잡이를 잡았다. 다시 그 드레스를 보기위함이었다. 어떻게 해도, 그것이 아내의 옷이라는 생각 들어 참기 힘들었다. 나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비치 드레스는 볼 수 없었다. 겨우 몇 초 동안 보았을 뿐인 그 비치 드레스의 무늬는 아내의 것과 비슷했을 뿐, 눈의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날들이 한 달쯤 이어졌다. 나는 결론 없는 날들을 견딜 수가 없어, 결심을 하고 그 맨션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가을의 기운이 감도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의 시선 너머로 손에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든 30대 후반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색이 변하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걸 때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뒤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자는 임부복을 입고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남자에게 달려가, 손에 든 지갑을 건네주면서 입술을 움직인다.

“조. 심. 해. 서. 다. 녀. 오. 세. 요.” 독순술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내 귀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내가 출근할 때 내 아내가 나를 배웅하면서 하던 그 말과 겹쳐졌다. 나는 쓰러지듯 곁의 나무에 몸을 기댔다. 고막에서 혈맥의 쿵쿵거리는 소리 들렸다. 그 모습은 틀립없는 과거 내 아내였다. 이윽고 얼어붙은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멀어지고, 건물뒤로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 글은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가 ‘생태통로’라는 에세이를 잡지에 실었는데 (어느 여인이 매일 하던 일상에서 조금 다른길로 돌아가면서 인생을 바꾸게 된 이야기) 그 에세이가 나가고 2 주 후 쯤 한통의 편지가 날아들었고 그 주인공이 오늘 얘기하는 ‘야마오리’씨의 사연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지나간 내 결혼 생활을 떠 올려본다. 결혼한 부부가 다른 사람 누구와 함께 매일 산다는 것 처럼 고역이 없다. 특히 아들을 키우면서 일찌부터 나는 이것을 각오 해왔다. 아내 편에 서 주지 않는 남편은 이미 아내를 잃은 것이다. 몸을 못 쓸때까지 열심히 나를 지키며 살다 가리라는 각오는 결혼 초 부터 생긴 마음이다. 자식 사랑을 죽을때까지 못 놓겠다고 붙잡는 부모는 이기적이고 무식한 부모다. 우리는 모두 홀로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한다.


그림을 그려볼까하고 금붕어 연못을 찾아갔습니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니 금붕어들이 수면위로 훌쩍들 올라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