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샵에서 처음 만난 영 할머니(81세)의 이야기다. 바쁜시간이라 긴 얘기는 못하고 혜어졌는데 아침에 통화하여 지나간 이야기를 조금 듣게됐다. 아마도 팔십평생 살아온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번호를 붙였다. 제목이 어울릴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으로 정했다.
“우리 남편이 두 달전에 돌아가셨지요.”
“어머나 안됐네요. 연세는요?”
“89세였어요.”
“오, 그리 억울한 나이는 아니네요.”
“잘 살아오셨어요. 아마도 나는 우리 남편을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요.”
“무슨말씀인지요?”
“내가 캐나다에 이민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이었어요. 연세 간호학과를 나와서 다행히 오자마자 취직이 잘 됐어요. 평소 건강하던 남편은 돌아가시기 전에 디맨시아와 스트록으로 고생했어요. 병원 간호원이 간호하려고하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아서 내가 꼭 붙어서 그 분 마지막을 다 보살펴드렸지요. 매일 내가 쳐 드리는 피아노소리와 찬송가를 들으면서 하루하루 견디셨지요. 그이는 내가 부르는 찬송가를 무척 좋아했어요.”
“피아노 칠줄 아시는 군요.”
“아, 그리 잘 칠줄은 몰라요. 독학이예요. 우리 어머니도 그랬고요.”
영 할머니는 어렸을 때 매일 가정예배를 보면서 자라나셨다는데 그때는 그럭저럭 교회만 다녔고 캐나다에와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됐다고 한다.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50불 밖에 없었다는데 그 고생과 힘든 세월 이야기는 두고두고 들어보아야 될 것 같다.
시아버님이 영 할머니의 친정 어머니를 연모하다가 결혼까지는 잊지 못하셨단다. 두 분은 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모두다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인연이 안 되었지만 아들이 사랑하던 여인의 딸과 결혼하게 된 것 만으로도 시아버님은 커다란 위로를 받으신 듯 했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며느리 (영 할머니)에게 당신이 친정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자주 털어놓았다고 한다. 영 할머니의 친정 어머니는 공부밖에 몰라 일본으로 유학가서 의과에 들어갔지만 피가 무서워 도중에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했다고한다.
고운 미소와 풍성한 은 빛 머리카락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삶의 흔적이 그 분의 몸 전체에 베여있다.
“제가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그냥 형님이라 불러요.”
“아, 형님 좋아요. 지금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나를 형님이라 부르고 있는데 나도 이제 형님이 생겼네요.”
이번 아일랜드 나잇에 피아노치면서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Okay”라고 대답해 주신다. ‘제 7회 아일랜드 나잇’에 출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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