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빅토리아문학회에서는 박양근교수를 모시고 강의를 듣는다. 벌써 여러해 째다. 왜? 한 사람의 강의 만 듣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박교수는 해마다 우리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강의를 하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매번 교제를 책으로 묶어와서 느슨해 지려는 회원들에게 기름을 듬뿍 주어주고 간다. 우리회원 모두가 박교수의 강의를 무척 좋아한다.
예정대로 어제 우리 집에서 두번째 강의가 있었다. 교제 제목이 ‘인생의 지혜를 찾는 산문 읽기’다. 삶의 지혜를 찾기위해 24 명의 작가들이 쓴 책에서 발췌해 온 내용들을 읽으면서 우리 회원들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던가 ‘아,’ ‘그래요’, ‘맞네요’등을 작은 소리로 내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한 작가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은 <에크하르트 톨레>의 ‘불만과 분함’이다.
인간은 에고의 족쇄에 갇혀있다. 불만은 에고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모든 불만은 마음이 만든, 당신이 완전히 믿고 있는 작은 이야기다. 불만을 큰 소리로 말하든 단지 생각 속에서만 하든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 할 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면서 불만만으로 즐겁게 생존하는 에고도 있다.
그런 에고의 포로가 되면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이 습관이 되고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무의식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든, 혹은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것은 이 패턴의 주된 부분이다. 욕하기는 이런 분류표 붙이기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을 이기려는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인 폭력이 있다.
분함은 불만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일이며, 이것은 에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태 준다. 분함은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에고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하지 않은 것,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해서 분개한다. 에고는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지 않고 그것을 아예 그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당신안의 무의식, 즉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불만스러워하는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에고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오래된 마음의 방식이나 생각의 습관은 당분간은 여전히 살아남아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배후에는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이 가진 추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차릴 때마다 매번 힘이 약해질 것이다.
나는 이 공부를 하면서 어쩌면 사람의 심리를 이 처럼 잘 표현했을까 감탄하고 또감탄한다. 사건이나 사물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속히 알아차림을 가짐으로서 내 속에 자리하고있는 에고의 힘을 조금씩 죽여야겠다.
에고 죽이기다.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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