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이분(내가 형님으로 부른다) 얘기를 쓴 적이있다.
아침에 햇살이 곱고 낮에 특별한 계획이 없어 형님에게 전화드렸다. 마침 시간을 낼 수 있다기에 집안을 정리하고 12시에 모시러갔다. 시내에서 바다를 끼고 산책도하고 멀리 들어오는 커다란 패리와 작은 보트를 타는 이들도 정겹게 보았다. 이곳에서 항상 앵무새를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아저씨의 뒷 모습도 슬쩍 찍어가며 단풍든 돌담길도 즐겼다. 돌고래 새끼의 출현도 보았으나 사진은 못 찍었다. 오리떼들은 언제나처럼 유유히들 헤엄친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항구중 하나로 손색없는 빅토리아다.
점심 먹으로 Spinnakers 에 들어갔다. 음식이 나오는동안 그리고 점심을 끝내고도 우리는 껄껄 깔깔 웃음을 그칠 수 없이 즐거웠다. 그것은 형님의 지나온 얘기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요. 엘리샤 내 말좀 들어봐요. 세상 뜬 남편은 돈 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나는 죽어라 가게운영하느라 펄펄뛰고 일 하는데 이 양반은 아침에 휘익~~ 한번 들러보고는 나가는거요.”
“아니, 어디로요?”
“그게, 으 하 하 하.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너무 미워서 걍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우.”
“아니 뭘 어떻게 하셨길래 아직도…”
“그 양반은 농사짓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요. 대학에서 전공도 그랬고. 우리는 토론토에서도 한 시간 반 들어가는 시골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땅 많은 캐내디언을 사귀어가지고 거기에다 무우 배추 총각무 열무등을 한국에서 씨앗을 붙여와서 농사를 지었지뭐요.”
“어머 얼마나 많이요?”
“히 히 히 그게 기막히지요. 넓은 땅에 트럭터를 몰고 씨를 뿌렸으니 배추 무우등이 줄 끝이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만큼요.”
“아, 그럼 배추장사로 돈 많이 버셨겠어요.”
“그게 아니니까 지금도 펄펄뛰는 것 아니겠소?”
“그럼 그 많은 양의 채소를 어떻게 하셨어요?”
“모두들 와서 가져가라고 했지요. 멀리서와서 가져가는데 우리 남편은 “한 보따리에 얼마 내세요.” 그 말도 못했지요.”
“아이고나, 저런 쯧쯧. 그럼 다 공짜?”
“거의 그랬다우. 나는 가게일로 돌 볼 수 없었고 밭에 농사는 그 양반이 다 관리했으니까요.”
“어머머머 나, 우째 그런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내가 아직도 이를 박박 갈지는 않죠.”
“무슨 다른일이 또요?”
“우리가 사는 지역이 미국 국경과 아주 가까웠어요. 그런데 그 양반이 미국땅에까지 내려가서 또 농사를 지은거지요.”
“네에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엘리샤.
“오, 주여 말 마슈…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수?” 한숨쉬는 형님. “그런데 그양반이 내게 이렇게 말 하더라구요. “내가 골프치는 것 보다 낫잖냐?”고요. 골프치면 돈도 많이들고 시간도 많이 드는데 본인은 야채 자라나는 것 바라보는게 너무 행복하다고. 열무꽃이피면 돈은 못 벌어도 노란 것들이 너풀거려 보기는 참 좋았지요. 돈 안되는 것에 열심이었던 우리 남편. 으 흐 흐 흐.”
“아이고 참 재밋네요. 내가 그때 형님댁을 알았으면 그 채소밭에 그림 그리러 가도 좋을 번 했겠어요. 그런데 정말 특이한 분이셨네요.”
“그양반 나중에 돌아가실때는 내게 이렇게 말 했지요. ‘당신 없는 내 인생은 있을 수 없었다.’고요. 나이 더 먹고는 철이 낫는지 미안해하고 마지막을 잘 보내다 가셨지요. 디멘시아로 정신이 오락가락 했지만 내 피아노소리 매일 들으면서 즐겁게 살다갔어요. 나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양반 미워하는 것 다 지우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잘 보살펴 드렸구요. 간호원이었던 내 수발 다 받고 았으니 참 복 많은 양반이었어요.”
“와, 부러워요. 그렇게 서로 유종의 미를 거두시다니 훌륭해요 형님. 인내한 보람을 찾으셨네요. 다음에 만나면 후편을 부탁드려요. ” 파킹 시간이 다 되어가서 서둘러 식당을 나와야했던 아쉬움을 남기고 형님과 헤어졌다. 형님은 81세로 아직 건강은 웬만한데 본인이 열심히 운동하고 자기관리를 잘 하고 계신다.
최고의 날씨에 최고의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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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교장선생을 초청해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번 아일랜드 나잇에서 모금한 1천불과 내 도네션 1천불 그리고 한상영선생의 3천불해서 5천불을 기증했다. 앨런교장선생은 9월초에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가 말일경에 돌아온다. 그의 금년 마지막 출입이다. 72세의 할아버지가 아직도 젊은이처럼 일 한다. 돈 버는 일은 아니고 자기 돈 써가며 가난한 나라 아이들 학교짓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해서 조금 더 밝아진다. 앨런교장선생의 계획된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