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는 조금일찍 자리에 들었다.
내 잠 자는 시간을 조금 당겨 보자는 심사였다. 10시30분에 자리에 들면 내 시간으로는 이른 편이었다. 잠은 바로 들었나보다 그러나 새벽 2시 반에 화장실을 다녀온 후 잠이 깨인다. 그러다가 곧 잠이 들려니 했지만 눈은 점점 더 또렸해진다. 밤에 잠이 달아나면 이상한 공상들이 머리속으로 마구 파고들어와 혼란스러워진다.
낮에 화단에 널부러진 꽃 대들을 잘라 정리하고 특히 장미는 다시 꽃을 피우기위해 전지를 하느라 매우 힘들게 보냈다. 힘이라고는 남아있을리 없는데 잠은 왜 안 올까? 아랫층으로내려와 불을 환희 켜고 친구가 보내온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읽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않고 보관해서 61년동안 무려 3,000 여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웠던 김환기.(1913년 – 1974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천석지기 지주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도쿄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귀향했다가 대학 진학을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차 유학의 길을 떠난다. 손이 귀한 집이라 혼례를 치르긴 했지만 그는 어느 것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질에 맞는 것은 예술뿐이었다. 스무살 청년 김환기가 일본대학의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한 이유인데, 흥미롭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환쟁이’ 공부를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주로 살 테니 따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이상 무슨 공부를 하든 상관 없을 것이었다.
처녀작 ‘종달새 노래할 때’로 일본 화단의 공모전에서 입상한 김환기는 조선의 전통을 그림에 접목하겠다는 결심을 안고 귀국하여 김용준, 정지용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1941년 첫 국내 개인전을 연다. 1942년 부친이 사망하자 재산을 정리하면서 그는 아내와도 이혼한다.
그러고는 백석과도 교분을 가졌던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츠오의 소개로 이화여전 출신의 현재 아내 김향안을 만난다 김향안은 이후 김환기의 ‘절대적 동반자’가 된다. 그즈음에 김환기는 백자 항아리에서 조선의 정서와 정신을 발견하면서 적극적으로 수집에 나선다. 백자의 발견은 그가 새로운 작품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고국과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향수를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대표작이다.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참고로 아내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시인 이상의 아내였다. 이상이 결혼 4개월만에 일본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자 일본으로 건너가 임종을 지켜보고 유골을 가져와 매우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는데 김환기의 적극적인 구애로 재혼이 성사됐다. 두 사람은 1964년부터 미국 뉴욕에서 생활해 왔으며 아내 김향안은 김환기의 예술세계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자두가 익어갑니다. 알은 작지만 참으로 단맛이 제대로 납니다. 마당에 우두두 떨어진 것들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씻어 놓습니다. 여름내내 물 준 것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