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박우석 니콰라과 선교사 가족을 초대했다. 지난 주에 이 시간을 떼어 놓았었다. 요즈음 나이 탓인지 새벽 5시 경에 잠이 깨일때가 많은데 오늘 새벽이 그랬다. 아무리 잠을 자려해도 머리가 무슨 생각으로 뱅글뱅글 돈다. “아이구 일어나자” 시간 낭비 할 일이 무엇있를까 싶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1시에 오실 선교사 가족들을 위한 점심준비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우선 떡 찔 준비부터해야하기에 냉동실에있는 찹쌀과 맵쌀 가루를 꺼내어 녹인다. 고물입힐 삶은 팥도 역시 냉동실에서 꺼내 녹이는 준비에 들어간다.
다음으로 어제 불려놓은 고사리와 고구마 줄기를 각각 삶는다. 메밀 묵을쑤는데 30분이 소요된다. 시간을 넉넉히두고 쑤지 않으면 묵이 탄력을 잃어 맛이 떨어진다. 요즈음 개발한 북어요리를 준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채살 양념에 들어간다.
예정시간에 맞추어 들어온 선교사님 가족들이 집안 구경을 하면서 찬장에 그려놓은 그림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천정에 그려진 그림도 보면서 모두들 놀란다. 18년 열악한 선교지 니콰라가에서 사역하고 지금 4개월간의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란다. 처음으로 갖는 이 귀한 시간을 이 처럼 아름다운 빅토리아에와서 며칠이라도 있게된것에 무척 기뻐한다.
식사 후 집 현관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한 후 계획된 드라이브 ‘Chemainus’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거리는 거리다. 빅토리아에 살고있는 분들은 다 알고 있는 곳이지만 처음 이 마을을 방문하면 모두를 감탄한다.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님 온 가족이 이 마을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엽서도 사면서 참으로 행복한 모습들이다. 운전해온 나도 덩달아 기분좋게 잘 다녀왔다. 나콰라과는 지금 부정한 정부를 상대로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을 무조건 다 죽이고 있어서 나라가 퍽 어수선하여 선교사및 외국인들의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간 상태다. 부디 선교사님 가족이 다시 니콰라과에 들어가서도 아무일 없이 사역에 전염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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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녀온 Chemainus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1858 년에 설립 된 Chemainus는 이미 저명한 First Nations 마을이었으며 밴쿠버 섬에서 가장 번성 한 벌목 도시였다. 1862 년에 제재소 건설은이 지역에 더 많은 일자리를 가져 왔고, 목재의 추출, 톱질, 가공 및 선적은 모두 마을에서 처리되어 500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Chemainus 제재소가 1983 년에 문을 닫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한 회사의 경제가 붕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Chemainus의 시민과 시의회에서는 신속하게 부흥 계획을 시작하고 마을이 유명한 벽화를 위촉했다. 후속 관광 산업의 호황으로 인해이 마을이 지어졌다.
벽화는 대 성공을 거두었고 벽화가 그려진 이래로 이 마을은 5,000 명이 넘는 사람들로 성장했으며 300 개가 넘는 기업이 문을 열었다. 벽화는 많은 관광 회사가 주요 관광 명소로 각광 받고 있으며, 1993 년에 개장 한 400 만 달러 상당의 Chemainus Dinner Theatre는 커뮤니티를위한 또 다른 추첨을 제공하여 274 개의 좌석 극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Chemainus의 아름다운 해변 환경과 소도시의 매력으로 인해 55 세 이상의 인구 중 상당수가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은퇴 공동체 중 하나가되었다. <인터넷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