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그리던 해바라기, 한 시간 Touch up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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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신이 누나야 나 호영입니다. 일전에 친구 넣었는데 누가가 동의 안 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누나 이름을 넣어봅니다.”
“누구라고? 호영이? 아, 아, 정말 방가방가 그런데 이게 얼마만인고?”
잊혀졌던 6촌동생 호영이다.
카카오 스토리에 떠 있는 6촌 동생의 얼굴은 이미 초등학생이 아니다. 내가 이 동생을 본지가 오십년도 더 넘은 듯하다. 카카오 스토리에 올라온 사진을보니 길에서 보면 분명 모르고 지나칠 일이다.
참한 아내와 다른 형제 가족들이 함께 백두산 구경간 사진들이 들어있다. 아내가 착하다고 말한다. 예쁜데 착하기도 하면 금상첨화라고 응수해주었다. 일시에 나를포함한 한국 동생들3명이 그룹톡을 연결한다. 모두들 반갑다고 한마디씩한다. 아, 얼마나 좋은 세상인고.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 방학동안 시골 동생네 집에서 한 달간 씩 머물며 놀았다. 6촌이지만 가족이상이었다. 그동안 그의 누나와는 가끔씩 카톡을 하곤했는데 이 남동생과는 처음이라 우리는 할 말이 많았다. 자기도 은퇴는 했지만 아직 직장을 6 ~ 7 년 정도는 더 하고 70되어서 은퇴할 예정이란다. 한국에는 직장 난이라고 하는데 은퇴하고도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남아있게되니 그의 능력을 짐작하게된다.
“아버님이 참 멋쟁이셨지?”
“누니임~~ 울 아버지 완전 바람쟁이셨지요.”
“으 흐 흐 흐 그렇긴 하셨지. 니네 집에 아예 다른 여자가 들어와 있곤 했거든.”
“나는 어려서 몰랐는데 나중에 형님들이 말 해 주셔서 알게됐어요. 난 그냥 집에 일 하는 아는 아줌마들인줄 알았죠.”
이제 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들이다.
동생네집은 나의 5촌 아재(아저씨의 경상도 발음)댁이다. 경상남도 대저면에서 아재가 수리조합장을 지내셔서 집은 당시 보기힘든 매우 아름다운 대 저택이었다. 채소밭도 아주아주 넓었고 방은 다다미 방이었는데 아들 다섯에 딸 하나였다. 아재는 음악을 즐기셔서 자녀들이 그 당시 시골이었지만 각기 악기도 다루며 즐겁게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아재와 아줌마는 언제나 나를 따뜻이 맞아주셨다. 내가가면 세세히 배려 해주셨고 나는 그 시골 넓고 깨끗한 집에서의 여름 방학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올때는 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고명딸 성애와는 밭에서 매뚜기나 잠자리도 잡으며 도우미 언니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음식들 또한 별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성애는 나와 특별히 친했는데 내가 미국에 살때 여행중 한번 다녀 가기도 했다. 이렇게 카카오 스토리로 안부를 물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좋은 추억을 가지고있는 아재 가족인 동생들의 음성만 들어도 너무 반갑다. 내가 2020년 봄에 여행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하니 모두들 환영의 손뼉들을 친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제 다 늙어가는 모습이다. 그쪽 가족은 6 남매중 남은 가족이 3이라는데 우리는 7 남매중 역시 3명 남았다. 언제 어떻게들 이 세상을 떠날련지 남아있는동안 자주 안부하며 살아가야겠다.
핏줄이 무엇인지~ 이것은 끊을 수 없는 강력한 끈이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참 행복하다. 오늘은 그냥 이 표현 밖에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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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비가 조금씩 오는 날이었다. 두어달 전에 코스코에서 사다놓은 튜립과 히야신스 구근을 심었다. 몇 년전에 튜립을 처음 심었을때 동물이 다 파먹어서 다시 사다 심은 경험이 있다. 구글을 검색하니 뿌리를 심고 그 위에 동물이 건드리면 아프도록 까시있는 식물을 넣고 흙을 덮으면 좋다고 나와있다. 마침 우리집에 장미가 많아서 장미 가시들을 고랑에 올리고 마지막 흙을 덮었다.
다 정리한 후의 밭 모습, 내년 4월부터 여기서 튤립이 활짝 피게 될 것이다. 정성들여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