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의 제 77대 도제(재임 1523년~1538년) 안드레아 그리티(Andrea Gritti, 1455년~1538년 12월), 참 멋진 이 남자를 소개한다.
어릴때 파도바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조부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어학에 통달하여 모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라틴어, 그리스어, 터키어도 말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25세 무렵부터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일이 잦았으며, 그곳과 본국 사이를 연결시킨 소맥 무역으로 상인으로서 성공했다.
베네치아에서는 벤드라민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고 또한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사귄 그리스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얻었다. 하지만 1499년 터키와 베네치아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첩자 혐의를 받아 체포되고 만다. 그 직전에 일어난 터키 조선소의 화재가 그의 비밀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밝혀주는 사료는 없다. 형은 이 일로 사형을 받게됐다.
그러나 그리티란 사나이는 머리가 좋고 교양도 높은데다가 당당한 체구의 미남자였을 뿐 아니라, 사귀는 남자마다 반해버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친한 친구 사이인 재상 아메드는 물론이고 술탄인 바예지드까지도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으며 특히 터키인 유력자들의 구명운동으로 인하여 사형을 면하게 된다.
사형을 면했을 뿐 아니라 술탄은 그를 석방하여 베네치아로 돌려보냈다. 그 이유는 이미 타진을 시작하고 었었던 강화조약 협상을 위해서였다. 1503년에 조인을 마치게 되는 터키와 베네치아 간의 강화조약은 안드레아 그리티 혼자서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을 몇 차례나 오고가며 이룩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약이 체결된 후 베네치아는 그를 중추 그룹의 한 사람으로 선출했다. 1508년 캉브레 동맹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총사령부 참모로 선출된다. 당시 베네치아 육군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 없었던 상황에서 재편성이라는 대사업부터 시작했고 게릴라전법을 구사했다. 그는 잇단 패전으로 주눅이 들어있던 병사들의 패배의식을 씻어 없애고 사기를 바로세워 나가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 게릴라 전술은 조금씩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베네치아가 잃었던 파도바와 비첸차 그리고 브레시아도 되찾게 된다.
하지만 모든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군 대장에게 사로잡힌 일도 있었다. 사로잡힌 그는 곧 대장 트리볼치오와 친한 사이가 되어 기회를 엿보다가 말을 달려 탈주 하는데 성공한다. 또 한 번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왕이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하여 포로인 그에게 갓난 왕녀를 위해 영세 때 대부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을 거치면서 그는 마치 손수 모집하여 양성시킨 병사라도 되는 듯 용병들을 잘 다독거려 부려먹는 법으 터득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한 막사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나누어 먹으면서 돈으로밖엔 움직이지 않을 용병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나갔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본토의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1514년해군 총사령관으로 선출
*1517년 육. 해 양군의 군비 총책임자로 선출
*1521년 본토의 속령을 통치하는 총 책임자로 선출
*1523년, 68세의 나이에 공화국 원수로 선출되어 죽기전까지 원수로 15년을 일했다. 법율을 고쳐 자식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식량부족 때는 자기집 재고량을 대량으로 염가방출하며 국가 비축양곡의 재고량 유지에 이바지 하였다. 베네치아 독립은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한 그는 세력균형의 실현과 유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현시욕도 강해서 화려한 옷차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의상을 보는 외국 사절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예를들면 성모 마돈나의 축제일에는 순백의 능직 단자에 은실로 수를 놓은 긴 망토를 걸치고 나갔고, 에스파냐 대사를 주빈으로 초대한 연회에서는 금관 단자 망토의 긴 자락을 끌며 나타나곤 했다. 키가 훤칠하게 큰 근육질의 체구에 순백의 턱수염을 기른 그의 용모와 풍채는 차려입은 의상이 아무리 현란해도 무색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네치아에 있는 안드레아 그리티의 무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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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프랑스와 독일 및 에스파냐가 싸워 패전한 프랑스 왕이 포로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 소식을 가지고 원수 안드레아를 만난 에스파냐 대사가 카를로스 1세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가를 설파하면서 베네치아도 프랑스 따위는 상대하지 말고 에스파냐편에 서라고 권한 일이 있었다. 이 말에 대하여 원수 안드레아 그리티는 이렇게 답했다.
“두 분 군주가 다 나와는 친구 사이이니 내 상념이 복잡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나로서는 승리를 구가하는 왕과 함께는 그 기쁨을 나누고 불행을 한탄하는 왕과는 함께 울기로 하겠소.”
이 말을 전해 들은 카를로스 1세는 베네치아를 비난하지 않았고, 옥에 갇힌 프랑수아 1세는 풀려난 뒤에도 평생 그 말을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자야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 안드레아 그리티 ,이 남자도 내 사랑의 책장에 오늘부터 넣어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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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그리티’를 그린 당대 유명한 화가 ‘티치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