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글을썼고 잠 자리에 누웠다. 그 시각이 3시였는데 4시 16분인 지금도 잠을 이룰 수 없다. 왜 서일까? 내게 질문을 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내 눈은 또록또록 잠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왜 나를 잠 재우지 않으실까? 골똘한 생각에 잠겨본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시 켜서 이글을 쓰게 만드는 분은 분명 이 시간에 내가 써 내려가야할 글이 있다고 말 해주는 듯 하다.
나의 어린 시절의 힘든 시간… 그리고 70 노인이 된 지금 나는 나의 후배 들에게 무슨 얘기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그것을 이 밤중에 털어 놓아야 할 것 같다.
이번에 엘에이에서 올라온 언니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시기적으로 좋지 않게 태어났어. 나는 어린 시절이 행복했었거든. 아버지는 나를 예뻐하셨고 많이 업어 주셨고 큰 언니들 교복도 요 밑에 넣어 구김살이 없도록 펴 주곤 하셨지.”
“어머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자상한 면이 있었다구”
“그럼”
“허”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다.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한 얘기며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다. 나는 6.25 때 두 살이었고 그때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슬프고 비참했다. 다섯살 때의 내 기억은 피난민들로 북적대는 부산이 한 판자집 뿐이다. 어찌 내 어린시절이 행복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언니와 나는 7년 터울인데 우리집은 그때 마당큰 연못에 금붕어를 기르며 벼틀에서 실크를 짜 내던 공장주인인 아버지가 큰 기침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어린시절 나는 늘 외로웠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가족은 저마다 힘들었고 엄마는 우리들의 입에 밥 술을 넣어주기 위해 밤이 늦도록 일 하셨다. 내게 분노의 감정을 조절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져 묵묵히 살아가야만 했다.
나는 대학도 내 스스로 벌어가야만 했고 첫 직장도 내가 뚤어야했다. 이민와서의 삶은 더욱 더 치열했다. 내가 걸어온 70년의 세월은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시간이다. 자나깨나 다달이 내야할 공과금 때문에 시달렸고 집을 날리고 원하지 않은 동네로 이사도 많이 다녀야만 했다.
나는 절망했고 슬펐다. 그럴때의 내 기도는 허공을 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셨고 나로부터는 아주 먼 우주 저 편에 계셨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살아왔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 산 속에서 호사를 누리는 며칠동안 하나님은 내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얘야, 힘들었지? 나는 네게 줄 것들을 차곡차곡 저축해 놓았단다. 이자 붙여 주는 것이니 더 좋지?”
눈물이난다.
누구에게나 절망적인 순간이 왜 없을까? 그러나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기를.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어린 기도를 귀담아 듣고 계신다. 후이주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기위해 단단히 창고를 채우고 계신다. 아들의 별장에 먹을것이 지천으로 쌓여있고 지하실에는 어린아이들 각종 게임과 팝콘 머신까지 즐비하다. 오가는 친구와 친척에게 내 놓은 이 공간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한 만큼 그렇게 우리는 받고 갈 것이다. 젊은이 들이여 현재 힘들다고 불평 말기를. 사람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며 주어진 직장에 최선을 다 하라. 그대들도 나중에 걸어온 발 걸음 만큼 반드시 보상이 있을진대 매일 기쁘게 살아가기를 부탁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대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