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 2019 – 사이즈 16″ x 20″ Oil on Canvas ( Sign 끝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찾아본다. 그 중에 이런 글이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불이익라도 우주의 잘됨을 위해 쓴 잔을 받아들이셨다. 즉 자신의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전체의 본성이 가져오는 것, 이 본성을 유지하느데 이바지 하는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 대해 선하게 사는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이 우주와의 교감을 지체해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당신이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는지를 기억하라. 우주와 교감하는 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다. 로고스가 자신의 뜻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그 뜻에 대해 반응해야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루크스가 그에 반란한 장군을 용서한 이유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주를 잘되는 쪽으로 가게하는 것이고 이것이 곳 선이다. 그런데 이 선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왕권은 상관없었고 그래서 그것이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당신도 우주의 로고스와 인간의 이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당신의 마음를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는데 이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도 지나가고 당신도 지나가 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성과 로고스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필멸하는 것은 애고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신경써야 하는 것은 로고스인데도 우리는 애고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 애고는 다시는 지금의 나가 되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이 나름대로 우주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이다. 때문에 애고의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간다. 이와동일하게 로고스라는 이성에서 원칙이 나왔다. 그러기에 이 원칙들을 생각하면 나는 로고스에 들어간다.
이 로고스는 평안하고 고요한 안식처다. 당신의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네가 피해를 당했다는 불평도 없어질 것이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불평을 버려라. 그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즉 애고에 해당하는 부분을 내려놓으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사실 가능하지는 않다. 이 말을 하고있는 마르쿠스 마져도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애고의 부분에 치중하느냐, 이성에 치중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더 이익이 된다.
아침에 마지못해 일어났을 때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지금 인간의 임무를 하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내가 이렇게 자는 것은 우주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임무는 로고스를 실천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기까지 읽는데 엄마 생각이 난다. 아침에 잠을 좀 더 자려고하면 잔소리 없이 이불을 걷어 버렸다. 겨울에 (여름에도) 이불 없이 잠을 잘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훈련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릴때부터 인간의 임무를 하기 위해 일찍일어났던가? 좀 우습기도 하다. 지금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때는 정말정말 야박한 엄마라고 얼마나 불평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가 봐야 뭘 좀 알게되는가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과 정물’ 계속 Touch up 하는 중
그동안 배추김치와 총각김치를 먹었다. 코스코 간김에 오이 3봉지 사와서 김치 담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