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德經句 小考>

                            

                                                                            한   

사피엔스라는 책을 쓴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는 아프리카를 떠난 우리의 조상이 다른 종족과 많은 종의 동물을 멸종 시키고 이 세상의 주인이 되게 된 주된 이유가 호모 사피엔스 에게는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보를 나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지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초기 원시인들은 먹고 살고 추위를 막는 보존 본능을 위한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습득해야 할 지식의 양도 늘어 난다.  문명이 극도로 발달해가며  개개인이 그 많은 양의 지식 전부를  습득하기 어려워 진다. 그래서 학자들은 지식을 분야 별로 기초 지식과 전문 지식으로 체계화 하고  단계적으로 습득하게 하였고 학문은 더욱 발전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야 별로 효율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2500년 전 춘추전국 시대 이런 학문의 발달을 예견한 노자가 도덕경에 그것을 기록했다.

爲學日益 (위학일익)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요

그런데 노자는 학문을 익힌 지식인을 찬양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爲道日損 (위도일손)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덜어 내는 일이다.

학문을 이야기 하다 불쑥 도를 말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마치 그동안 쌓아온 지식을 하나씩 덜어내라는 강한 경고 같이 들린다.  학문은 인류사를 발전시켜온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개인적 복수심에 불타는 오자서가 이끄는 오(吳) 나라의 군대가 초(楚)나라의 수도 영성을 함락시킨다. 방화가 일어나고 약탈과 강간, 살륙이 난무한다. 이런 반 인륜적인 일들은 나라가 망하고 일어나는 전쟁이 계속되는 춘추전국시대의 일상사다. 이런 시대 각 나라의 지배층을 차지한 지식인들을 보며 노자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짐작이 간다. 그러나 지식은 학문을 한 사람들의 두뇌 속에 기억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덜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라는 이상적인 개념을 설정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精神)의 중요성을 깨우쳐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즉 일종의 종교적 개념이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덜어내고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면 무위로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가 사상의 핵심인 노자의 무위자연사상(無爲自然思想)이다. 무위(無爲)란 무엇인가. 덜어내고 덜어내 종국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꾸밈이 없는 자연(自然)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無念) 무상(無想)과 비슷한 개념이다. 무념 무상의 끝에 해탈의 경지까지 갈 수 있다고 설파한 부처님도 공교롭게도 2500전 같은 시대다. 다른 점은 불교는 속세를 떠나 개개인의 성불(成佛)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에 기초한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성인지치(聖人之治)등 공동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일익(日益) 위학(爲學) 사회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일부 지배층은 권력을 차지하고 그 힘으로 부(富)도 쌓아 간다. 부익부(富益富) 과정을 거치며 공동체 내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사회는 빈부(貧富 )계층간  갈등이 생기며 혼란을 거듭한다. 역사를 돌아 보면 제국이 된 로마가 그랬고 흥망을 거듭하며 국명을 바꿔온 중국이 그랬으며 혁명의 나라 프랑스, 러시아가 그랬으며 삼국시대 이후 900여 차례의 전란(戰亂)을 겪었던 우리나라 또한 그랬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에 대한 욕망 재물에 대한 욕심, 우월감과 적대감 그리고 시기심 미움  교만, 잠재하고 있는 잔인성 등을 덜어내고 덜어낸다면 약자를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공유하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것은 분명하리라. 그런 점에서 보면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노자의 무위(無爲)나 부처님의 공(空)의 개념 보다는 500년 후에 ‘사랑 ‘이라는 화두로 사회적 약자들을 찾은 예수가 더 가깝게 다가 온다. 왜냐하면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 일손(日損) 덜어내고 덜어냈을 때 실행할 수 있는 숭고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기에.  

爲學日益 (위학일익)  사법고시 행정고시 언론고시로 20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자들과 부화뇌동하는 정치세력들이 벌이는 한국의 혼란상을 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노자의 도덕경 爲道日損 (위도일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아울러 그 무리에 어울려 춤추며 누구의 목을 따겠다고 외치는 목사와 거기에 환호하는 수 많은 신자들에 어리는 일익(日益)  먹어도 먹어도 차지 않는 아귀(餓鬼)의 모습에서 기독교에 만연한 크라이스트의 허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