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집 아가들의 잠자는 모습 : 이 넓은 방에 왜 이렇게 구석에서 잠을 자는고? 넷이 꽁꽁 뭉쳐서 잠 자리에 들었다. 참 희안하다. 처음에는 고은이가 올라가고 그 다음으로 두리 세번째는 나비가 올라갔는데 초록색 꼬리단 놈 라라가 기어이 나비를 밀치고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비는 하는 수 없이 다시 홰에 올라갔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없어 맨 끝 자리에 누웠다. 나비가 밀린다. 잠들었나 싶어 살짝 가서 사진 한 장 찍어왔다. 어떻게 밤 새도록 이런 자세로 잠을 자는지 닭들의 삶이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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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역사가의 우아한 복수
제1장의 ‘헤로도토스와 투카디데스’는 하나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사마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 크고 작은 국가의 흥망, 다양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자기만의 색깔로 살다 죽은 개인들의 생애, 전설과 신화의 시대에서 한(漢) 왕조에 이르는 수 천 년 중국 사회의 역사 전체를 입체로 재구성했다.
즉 ‘사기’는 인간과 권력의 관계를 밑그림 삼아 시대와 문명을 그려 낸 거대한 풍경화였다. 무엇보다도 사기는 엄청나게 많은 역사의 사실을 매우 정확하고 풍성하게 기록했다.
그가 이렇게 방대하고 풍부한 기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풍부한 나라였고 역사의 중요성을 인지한 권력자들이 기록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옛 사관들이 남긴 기록과 황실 도서관 석실에 들어 있던 책을 103종이나 참고했다. 뿐만 아니라 육경六經을 비롯해서 민간 서적 24종, 제자백가의 책 52종, 역사와 지리 정보를 담은 왕실 문서 20종, 문학서 7종이었다. 그 밖에도 금속과 비석에 새겨진 그림과 글, 오래된 건축물에서 나온 정보, 전설, 신화, 민담도 수집했다.
그러나 그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바로 이릉 장군의 일이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이릉 장군은 무제에 충성된 부하였는데 이릉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거세)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의 한과 포부는 이러하다.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어떤 경우는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경우는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고 최악이 궁형입니다. 천한 노복이나 하녀도 자결 할 수 있는데 제가 어찌 자결을 못했겠습니까? 세상에서 없어질 경우 문재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목숨을 끊지 않고 치욕을 견딘것은
- ’사기’ 때문이었다. 한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으나 이를 논하여 기록하지 못하고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했음을 원통히 여긴 아버지 사마담의 탄식이었고
- 이릉을 변호하다가 당한 치욕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 ‘사기’를 명산에 숨겼다가 성읍과 큰 도시에 유통하게 하려 했던 사마천은 욕된 형벌을 무제에게 되돌려 주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심판데에서 승자가 됨으로써 그 뜻을 이루었다.
무제는 올곧은 신하를 박해한 어리석은 군주가 되었고 사마천은 2천년 넘는 세월 동안 지식인과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토록 우아하고 지성적인 복수가 문명의 역사에 또 있을까?
사마천은 역사를 쓰는 사람이 반드시 부딪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섰다. 자연인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업량이 많았다. 종이도 아닌 죽간에 먹으로 글을 쓰면서도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생 시점과 상관관계를 크게 어긋남 없이 기록하고 서술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한 권만 뽑는다면 ‘사기’가 가장 강력하 후보가 되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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