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고있는 글 잘쓰는 문우 지희선씨가 금년 가을 아주 오랫만에 고국 방문길에 올랐다. 지희선씨는 한국에서 남편과 헤어진 후 딸아이가 세살때 모녀둘이 미국으로 이민갔고 홀로 딸을 어느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잘 키웠다. 지금은 디자인계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미국 700여개의 지점에 납품할 물건들 ‘바이어’의 자리에 우뚝서 있다. 이런 딸과 외손녀 이렇게 여자 셋이 고국을 방문했는데 그녀의 슬프고도 감명스러운 얘기를 듣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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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헤어져 그리움 불태우다, 40년만에 찾은 아빠가 지하에 계시다니!
“아빠, 지금 여기 있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사랑해요.“
딸이 산 국화꽃과 서툰 한국어로 쓴 엽서 한 장이 나를 울린다.    (Oct. 28 23)

* 어릴 때 헤어진 딸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다가, 유언장에 딸의 흔적을 남기고 떠난 사람. 1년만 더 기다려 주었던들, 그리운 딸 얼굴 한번 보고 갔으련만. 1년 차 시간을 두고, 지상의 만남을 흐트려 버린 신의 속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너무 늦게 찾아온 걸 후회한들 무엇하나.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3년 전에 나왔을 우리. 그나마, 경찰이 찾아준 배다른 두 동생을 얻은 게 위로라면 위로랄까.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이 아우러진 K-Drama 한 편 찍고 왔다. 미국 생활 40년, 아빠 묘소에 바칠 국화꽃과 영어권인 딸이 삐뚤삐뚤한 한글로 쓴 작별 엽서가 울컥하게 한다.

 

273. 석 줄 단상 – 창 밖의 예수 +

물러난 것도 밀쳐낸 것도 아닌 창 밖의 예수.
색 바랜 오랜 세월이 인연의 끈을 놓게 하다.
아롱아롱 떨어지는 눈물, 참회도 용서도 아닌 서러운 사랑의 별리! (Oct 19 2023)

< 메모 >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영도 경찰서로 향했다. 40년만에 처음 나온 딸과의 한국 여행. 흔치 않는 기회였기에, 어릴 때 헤어진 딸아이 아빠를 찾아주고 싶은 욕심이 마음 한 켠에 생겼다.
신고를 하고 기다린 지 만 하루, 하형사로부터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머뭇대는 말투가 일말의 불안감을 주었다.
“작년 3월 15일자로 돌아 가셨답니다.“
”네에?”
이거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이제 겨우 70 남짓한 나이, 사고사가 아닌 다음에야 백세 시대에 이 무슨 변고인가.
“정말요?”
”네…에.”
하형사의 마른 대답이 대형 햄머로 날아와 머리를 친다.
“흑…“
터져 나오는 울음을 한 손으로 틀어 막았다. 몇 십년만에 만난 친척과 함께 온 자갈마당 조개구이집. 이 비보를 듣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장소다. 차르르 차르르르. 창 밖엔 파도가 차돌을 씻고 가는 몽돌의 노래가 한창이다. 한켠에선, 젊은이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가 밤바다의 낭만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목이 메어 왔다. 딸아이는 입술을 꼭 깨문 채, 채 익지 않은 조개를 뒤적이고 있었다. 형부랑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여동생은 화장실로 뛰어가 버렸다. 백세 시대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70 겨우 넘은 남자가 이승을 떠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죄송할 거 하나 없는 하형사는 자기 탓이라도 된 둣, 거듭 죄송하다며 딸아이 아빠의 부음을 전했다. 아, 1년만 일찍 왔어도 그는 맨발로 달려 와 딸을 부둥켜 안고 울었을 게다.
“하형사님! 그 분 돌아가신 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확실합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 주신 주민등록 번호 조회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면 배 다른 두 형제들과 연락 닿을 순 없습니까? 내가 죽고 없더라고 저들끼리는 서로 피붙이로 알고 지내게 하고 싶습니다.”
”아, 그건 저쪽 응답의 문제라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하형사님, 여기까지 노력해 주신 김에 좀더 수고해 주세요.”
”글쎄요, 미국에서 오셨다 하고 사정이 딱해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장담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제가 그 쪽 연락처를 받을 순 없을까요? 제 진정성을 편지로 전하고 싶습니다.”
”그건, 개인정보라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제가 메시지를 남겨 놓았으니 답을 기다려 봅시다. 경험상 말씀 드리자면, 열에 아홉은 행복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에. 혹, 유산 분할 문제로 걱정한다면 당연히 포기 각서를 써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인정이 그리운 외딸이라 반이라도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을 제 살아 생전에 찾아주고 싶습니다.”
“네, 저희들도 간절함을 알기에 최대한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터라 각자 피치못할 사정도 있으니까요. 메시지를 남겨 놓았으니, 이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에. 하형사님! 감사합니다…“
바쁜 하형사인 줄 알면서도 차마 전화기를 놓치 못해 머뭇거렸다. 40년 전에 헤어진 딸아이 아버지를 찾아주려던 일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 이렇게 끝나는가. 시간은 이토록 잔인한 것이던가.
몇 십년만에, 엄마 앞세우며 뿌리 여행을 하고 싶다고 나선 딸의 고국 나들이. 이미 3년 전에 계획을 세웠지만, 공교롭게도 코로나가 터져 무산되었다. ’그때만 왔어도…’ 인생엔 가정법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 느꼈다.
딸아이 아빠를 찾아 주는 일은 고국 방문 목적의 제 일순위였다. 하필, 10년도 아니고 1년 전에 돌아가시다니. 이토록 비정하게 지상의 만남을 흐트려 버린 신의 속내를 알 수 없다. 하긴, 범인인 우리 인간이 어찌 신의 계획을 가늠할 수 있으리. 그렇게 그리워 하던 딸이 찾아 왔건만, 이제 그는 천국에서 영안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밟으면 바삭, 가루가 될 것같은 나뭇잎. 내 몸 속에 아직도 어떤 수분이 남아 있었던가. 멈추었다간 떨어지고 다시 괴는 눈물샘. 그가 불쌍했고 딸이 불쌍했다. 세상은 왜 이리 다 불쌍한 사람 집합소인가.
굳게 입 다문 수평선은 파도를 밀어내고 그 파도는 밀려와 발 아래 부서진다. 세월의 풍화 속에 과거형이 되어버린 얼굴과 이름이 흰 거품 속에 떠올랐다 가라 앉는다. 긴 세월 감돌아 온 여울목처럼, 흩어진 파자를 불러 모아 그의 이름을 하나 하나 조립해 본다.
ㅂ, ㅏ, ㄱ, ㅇ,ㅏ,ㄴ,ㅅ,ㅜ……
오래 전 파자되어 목울대를 넘어간 이름. 딸아이를 위해 한번은 다시 불러주어야할 잃어버린 이름이었다. 몇 십년만의 고국 방문 중 그 이름은 가장 앞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푸른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를 보며 세 살 짜리 딸아이가 소리쳐 부르던 ‘아빠’라는 그 이름. 이승에서는 다시 부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가시 박힌 이름이 되었다.
창밖의 예수. 유리창 하나 사이에 두고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서 있던 동검동 소성당 ‘창밖의 예수’상이 떠올랐다.
그는 창밖을 서성이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우리는 그를 불러 들이지 않았다. 간혹, 비껴간 인연을 떠올려 보곤 했으나 울며 지새던 내 젊은 날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60년은 더 살 수 있는데 6년이면 충분했다. 평생 울 걸 그때 다 울었다.
네 살박이 아들 녀석을 백혈병으로 졸지에 잃은 것도 감당 못할 슬픔인데, 큰 시누이란 사람은 여자가 받을 복이 없어 애도 죽을 병에 걸렸다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뱉었다. 아이는 누운 자리에서 그 모진 말을 듣고 이틀 뒤에 떠났다.
한 집안에 종교가 둘 있으면 안된다는 푸념에  나는 가정 평화를 위해 수십 년간 다녔던 교회도 남편과 함께 나갈 먼훗날로 미뤄두었다. 아이가 떠난 뒤, 3일만에 직접 주님 음성을 듣고 시체같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면 그들은 믿어줄까.
이혼 안해 본 사람은 여자가 용기가 있어서 헤어진다고 말한다. 용기가 아니라, 극도의 절망을 느꼈을 때 끈을 놓아버리는 거 아닐까. 물론, 나는 어린 딸아이에게 아빠를 잃게 한 죄인이다. 하지만, 나는 긴긴 세월 오로지 보속하는 마음으로 딸아이 하나 잘 키우려 최선을 다 했다.
그 세월이 어느 새 40년. 울며 불며 보낸 그의 편지에 점 하나 찍어 보내지  않았던 나. 미국까지 찾아 와,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던 그.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고 그 마음으로 다음에 만나는 여자는 울리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했다.
그의 새출발을 위해선 아예 미련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 생각했다. 낯설고 물선 이 천지간에 우리 둘만 두고 간다며 그는 울면서 돌아 갔다. 그것이 우리가 이 지상에서 가진 마지막 만남이었다.
훗날, 그가 늦깎이 재혼을 했고 아들을 둘 낳았다는 풍문만 전해 들었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우리 사이엔 서로가 깰 수 없는 유리창이 비껴간 인연을 대변할 뿐이었다. 결혼이란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버틸 수 없는 덫이 사방에 놓여 있음을 난 나이 서른에 배웠다.
정이 많고 유약했던 그. 그도 사는 동안 눈물께나 흘렸다. 이제 그는 지상에서 천국으로 멀리 이사가 버렸다. 먼저 간 아들 손 잡고 천국에서나마 눈물없이 지내길 바란다.
창밖의 예수. 그는 이제 우리에게 영원한 기도 제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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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포근했음 / 12도 / 수영장 다녀옴 / 내일 한국으로 떠나는 교우 부부를 초청해서 간단한 점심을 대접했다. / 이틀전에 밴쿠버에서 온 손님들이 사다준 배추 한 박스 김치 담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