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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베스트 산문모음’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에 들어있는 ‘내면 아이’ 는 나를 심쿵하게 만들었다.
주인공 열 한 살 남자 아이의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집 옆 텃밭에서 혼자 흙 장난을 하다가 닭들을 쫓아 다니고 있었다.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어린 그에게는 충분히 큰 세계였다. 화살촉처럼 뽀족한 까만 돌 조각도 있고 잘 보면 넝쿨 밑에 붉은 색 뱀 딸기도 있었다. 돼지는 돼지 우리에서 콧구멍에 들어간 밥알을 튕겨내기 위해 킁킁 거리다가 나뭇 가지로 등을 긁어주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봄내음 물씬한 오후 장다리꽃 위로 나비가 날고 산속 어디서는 뻐꾸기가 울었다.
그리고 이 모든 평화로움은 내가 모르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암탉이 꼬꼬 거려서 가보니 짚을 깔아준 둥지위에 달걀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제 막 나은 후라서 따뜻했다. 매일 하나씩 알을 낳는 닭은 우리 식구 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암탉이었다. 나는 조심 스럽게 달걀을 그자리에 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땟굴물 흐르는 친구들이 볼품없는 작대기를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나도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돌진했다. 그날저녁 집에 돌아오자 집 분위기가 흉흉했다. 낮에 낳은 달걀이 사라진 것이다.
부엌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큰 누나를 비롯해 식구들 모두가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텃밭에서 곧 잘 노는 사람은 나였으며 입가가 지져분해져서 작대기를 들고 나타난 나는 날달걀을 몰래 먹은 범인 행색 그 자체였다. 형은 나를 거짓말 쟁이로 몰아세웠고 그 벌로 나는 저녁을 굶어야만 했다. 누구도 내 결백을 믿지 않았다. 달걀 하나가 중요한 만큼 가난하기도 했지만 분함을 못이겨 손등으로 눈물을 닦자 얼굴이 더 지저분해져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되어버렸다.
그때 내가 느낀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무력감이었다. 우리를 쓸어뜨리는 것은 바로 이 무력감이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로 잡을 수 없을때 우리는 존재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텃밭에 꾸그리고 앉아 내가 울다가 분연히 생각해 낸것은 죽음이었다. 뒷동산으로 올라가면 떡갈나무 숲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달걀도둑 누명을 쓴 인생을 끝내기로 마음먹고 아무도 붙잡지 않는데 뿌리치는 자세로 비탈길을 올랐다. 오래된 나무들 때문에 낮에도 음산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해 수벽 작은 개울이 더 검게 보였다.
그냥 그곳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 얼마 안가 죽게 되리라고 희망하며 막연히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느껴졌다. 눈물을 훔치고 자세히 보니 초록색 개구리 한 마리가 개울옆 풀잎에 올라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 청개구리였다. 청개구리는 달아날 생각도 하지않고 계속해서 나를 쳐다 보았다.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청개구리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눈물을 글썽이면 청개구리도 글썽이고 내가 웃자 입 큰 청개구리도 미소지었다.
달걀 사건은 상처입은 아이를 내 안에 남겼다.
그 이후 누군가가 나를 의심하거나 내 진실이 무시당하면 그 상처받은 아이가 전면에 등장해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갔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예외가 없었다. 내 첫사랑도 이렇게 이별을 해야만 했다. 상처받은 아이는 독립된 인격체로 내 안에 머물면서 평생 아물지 않는 화상처럼 누가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신이 만약 내가 내가 원하는 시점으로 너의 인생을 되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 봄날로 돌아가 달걀을 가지고 있다가 식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달걀이 놓여있던 그 장소, 갓 낳은 달걀의 그 따스한 촉감, 날라 다니던 배추 흰나비와 돼지의 웃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자살할 마음을 어느새 잊게한 청개구리의 금태두른 눈동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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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아이는 일생 동안 우리 내면에서 살고 있다. (프로이트)
*모든 사람 안에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숨어 있다.(릴케)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우리 안에는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가 있어서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불안한 심리를 초래한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격의 한 측면이 과거의 어느 시절에 고착되어 있다. (심리 치료 전문가 존 브래드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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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흐림 / 11도 / 수영 다녀오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