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읽었던 책 ‘나를 사는 순간’의 저자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고통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불가사의 한 현상에 대해 찾아보니 “고통은 인간 존재의 깊은 신비와 복잡성을 반영하며, 단순히 이성적이거나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살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은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경험으로 여겨지지만, 철학적·종교적 관점에서는 성장과 깨달음을 위한 필연적 요소로 볼 수 있다.
내가 4년 반 전에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의 나와, 사고를 당한 후의 나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내 삶의 깊이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저자의 사고 기록을 보면서 내가 겪었던 상황과 많이 비슷해서 대비해 본다.
1) 안드레아스의 얘기 2) 엘리샤의 얘기
1)다친 뼈와 근육을 속여 비명을 지르지 않고 76킬로그램을 움직여 보려고 첫날 밤에 열두어 번 정도 시도했다.
2)사고로 넘어진 후 응급실에가서 X-Ray를 찍었다. 뼈 금간것(척추 T12, L1, L2)은 아무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냥 X-Ray만 찍고 왔다. 밤에 화장실에 겨우 기어갔지만 다시 일어날 여력이 없어서 바닥에서 기어기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고 밤 새도록 침대위에는 오를 수 없었다.
1)직선으로 서지는 못했지만 변기까지 그럭저럭 열 걸음은 갈 만 했다.
2)직선으로 절대로 서지 못했고 6개월 이상 워커에 의지하면서 움직였다.
1)많은 양의 이부프로펜 알약은 무용지물이었다.
2)이부프로펜 보다 더 센 마약성분을 4 시간마다 먹었지만 내 통증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1)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때는 복잡하게 얽힌 수천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2)움직이는만큼 통증이 오기 때문에 화장실에가서 변기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앉고 일어나는 상황마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의 통증은 최악이었다. 예수님의 고통이 나보다 나았을 것 같은 착각까지. 왜냐구? 예수님은 고통 받으셨지만 몇 시간 이었고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밤 낮없이 계속 통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의 시간은 대략 6시간이라고 한다.
1)더는 걷지도, 뭔가를 발견하지도, 여행하지도 못한다면, 누군가의 연인이 되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절망인가!
2)내가 할 수 있는일 들이 다 중단됐다는 절망감, 특히 이러다가 결국 ‘양로원에가서 죽을 수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나를 나락으로 몰고갔다.
1)나는 무너지지도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나았다.
2) 나 역시 살아남았다. 내게도 많은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다. 코비드 기간중에 음식을 해서 문 앞에 놓고 간 사람들, 좋은 약을 사라며 돈을 보내온 사람들, 꽃과 과일 바구니를 보내온 사람들, 무엇 보다도 기도로 도운사람들. 전화로 위로해 준 사람들, 특별히 그 유명한 ‘마라셀 칼슘’을 소개해준 사람 덕분에 지금처럼 몸이 좋아졌다.
1)주사도, 마취제도, 수면제도 그 무엇도 더는 필요 없어졌다.
2)나 역시 통증약도, 주사도, 수면제도 먹지않고, 잘 자고,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잘 살고있다.
**고통은 단순히 힘겨운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한 후에는 삶에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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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10도 / 수영장 다녀오다. / 앞으로 3일간 수영장 강사가 없어서 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