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교우 부부가 잠시 다녀갔다. 예쁜 카드와 키 채인그리고 ‘joy’가 쓰여있는 타올을 선물로 가져와서 일년동안의 감사함을 전하고 갔다. (다녀간 교우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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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서 살 때 만난 시조시인 지희선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소개한다.
오늘도 변함없이 캐나다에 사는 화가 친구의 글이 올라 왔다. 몇 년 째 매일 매일 써 온 생활 단상으로 4466번째 글이다. 제목이 <고통>. 안드레아스 알트만이 쓴 <나를 사는 순간>을 읽고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자기와의 처지를 비교해서 쓴 글이었다. 친구는 사고로 다쳐 거의 6개월을 걷지도 못하고 뼈를 저미는 고통을 겪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몇 시간이지만, 자기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긴 고통이라 원망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 어둠같은 터널을 용케도 빠져 나와 봉사의 삶을 기쁘게 살고 있다. 캐나다로 역이민 가기 전까지 심지가 깊고 매사에 긍정적 사고를 지녀 내가 많이 의지했던 친구다. 그녀는 책을 통해 작가와 동의한 부분이 많았나 보다. 특히,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도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성장과 깨달음을 위한 필연적 요소‘라는 점에 깊은 공감을 했다. 그녀의 글에 일일이 답글을 달지 않았으나, 영육간에 크고 작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벗을 위해 오늘은 몇 마디 붙였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며, 고통 없이 사는 사람 어디 있으랴! 우리도 그 긴 세월 상실의 아픔과 육신의 고통으로 영육간에 아픔을 겪었다. 인생이란 유한한 것. 결국 죽을 사람 죽고 살 사람은 산다. 생명의 재량권은 주님께 있으니, 삶도 죽음도 고통의 기간도 그 분의 계획 속에 있는 것. ‘신앙은 신비’라고 눙쳐 버리고 설명조차 없는 삶의 고통. 가끔은 원망하고 가끔은 은총에 감복하며 그네 타다 가는 게 삶이다.
그러나 인생은 바다에 넘실 대는 파도 같아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결코 절정의 순간에 영원한 머무름도 없고, 밑바닥에 주저 앉는 멈춤도 없다. 때로는, 태풍처럼 울부짖고 때로는 조약돌처럼 노래하며 영원토록 그 삶을 이어 간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내가 살면서 배운 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오직 나(Only Me)만이 아니라,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One of Them)에 불과하다는 거다.
나도 어린 아들을 잃은 아픔이 있다. 돌아 보니, 백혈병으로 어린 아들을 잃은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 이 세상의 고통을 혼자 다 진 듯, 괴로워하거나 신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순응하며 견뎌내는 것. 그 분이 주신 ‘자유 의지’의 견고함과 역량으로. 이게 피조물인 우리가 지닌 숙명이다.
친구여!
올해도 우리는 잘 견뎌냈고 잘 살았소!
아직도 흙을 밟고 사는 이 삶에 감사하며 또 새 해를 맞이합시다.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우리 서로 기도 속에 기억하며 내년에도 건강 보존하며 잘 살도록 노력합시다! 둘 중 누가 먼저 죽든지, 혹 소식 들으면 그래도 심쿵하고 울어 줄 친구 한 명 있음에 만족하며 삽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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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7도 / / 열심히 먹고 놀고 / 내일, 교우 한 가족 5명을 점심 초대했다. / 쉽게 마르는 아크릴 칼라로 작은 그림 하나 완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