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는 작가 지희선씨가 보내온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페이스 북에 ‘시간 여행’ 앱이 떴다. 1910년부터 1990년까지, 내 독사진을 넣어 과거로의 여행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재미삼아 눌렀더니, 갖가지 패션으로 꾸민 다양한 모습의 내가 나온다. 과거로 돌아간 내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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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선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상상속의 옛 모습을 보면서 털모자속의 연애사연을 올렸는데 글이 길어서 일부만 소개한다. 지희선씨는 나이가 든 지금도 멋있지만 옛날 모습을 재연한 사진이 배우가 따로없다.
마침, 그와 나는 데이트 약속을 해 두었다. 목적지는 밀양 표충사. 부산 초량역에서 밀양까지 기차가 쉬엄 쉬엄 가면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였다. 아이보리 털모자에 아이보리 스웨터를 입고 밤색 코트를 걸쳤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휴일이라 거리엔 오가는 차량도 많고 붐비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보다 버스가 굼떴다. 길은 막히고 오르락거리는 사람이 많아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중략~
서글픈 사랑. 말 그대로 <밀바의 서글픈 사랑>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놓으려 하고 밀바는 사랑을 잡으려 하는 점에서 틀린다. 사랑은 애걸하는 게 아니다. 자존심이 고개를 들자, 마음이 더 굳어진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언젠가는 이별의 날이 온다. 그 날이 오늘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웃지도 않고, 안녕도 하지 않고 목례만 하고 헤어졌다. 나는 무언의 안녕을 던지고 버스에 올랐다. 무념무상. 마음을 놓고 보니, 외려 평온했다. 그날 밤은 꿈 없이 잘 잤다.
하루, 이틀, 사흘. 그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생각이 고물거렸다. ‘이렇게 끝나는 게 맞나?’ ’우리 사랑이 겨우 이것 밖에 되지 않았나?‘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저녁 굴뚝 연기처럼 스물스물 올라오는 이 질문들은 뭐지?’ 미련인가?
명치가 아파왔다. ’전화 할까 말까.‘ ’그래, 안녕도 못했으니 일단 확인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냐?‘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몇 번을 하다가 다이얼을 돌렸다. “우리 헤어진 거, 꿈이에요? 현실이에요?“ 나는 애기처럼 물었다. ”당연히 꿈이죠! 오늘 오후 다섯 시, 우리 사무실로 오세요!” 호탕하게 그가 말했다.
언젠가 그가 정신없이 연말 파티 준비를 하다 약속 시간을 한 시간이나 놓친 적이 있었다. 나는 진이 다 빠져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그때, 그가 헐레벌떡 다방으로 뛰어 들어 왔다. ”미안! 미안!!“ 그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둘이 먼저 만나, 같이 가기로 한 모임이었다.
그는 모임의 주최자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었다며, 빨리 가자고 날 일으켜 세웠다. 난 내 모임도 아니고 잘 됐다며 안 가고 싶다고 뾰루퉁하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크게 삐칠 일도 아닌데 난 완전히 토라졌다. 모임 시작 시간이 임박해 오자,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한 그가 훅 한 마디 던지며 일어 섰다.
”선이! 우리 철학대로 사는 거야! 기다릴게!“ 자신만만하고 호탕한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철학‘이란 거창한 말이 나올 순간인가. 그런데도 모파상의 일어일물설처럼 딱 들어 맞는 단어로 들렸다. 멋졌다. 그 한마디가 나의 고집을 꺾고 모임 장소로 내 발길을 돌렸다.
그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반가이 맞이하며 갖은 친절을 베풀었다. 와인잔을 들고 건배하는 사이, 수많은 눈망울들이 호기심있게 우릴 쳐다 봐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심지어, 2부 오락 시간에는 “제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하면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가곡 <떠나가는 배>를 열창해 주기도 했다. 사랑 앞에 당당한 그 모습이 그토록 멋있을 수 없었다. 그게 그의 매력이었다. 아름답고 행복한 밤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 젊어 기뻤던 나날들. 섭섭해 하고, 화해하면서 간당 간당 위태로운 사랑을 이어간 연인들의 시간. 함께 걸어 나온 추억의 통로.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 시간들이 털모자와 흩날리는 눈발 속에 되돌아 와 서 있다. 지금보다 훨씬 예쁜 젊은 날의 내 모습으로. 앱이 선물해 준 아름다운 시간 여행이다. 어제는 가고 오늘 나 여기에 있다.
(01/0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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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지희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작년에 40년 만에 한국에 가서 위 사연의 그리워하던 옛 사랑을 다시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그와 헤어지고 미국에 온 후에도 그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이사 도중에 모두 잃어버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막상 찾아 보려고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4백명이 넘었되었고, 또 현재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지희선씨가 글을 쓰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인터넷을통해 그녀를 찾아냈고, 혼자 몰래 6년 동안이나 그녀의 글을 읽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사랑의 힘은 참 대단하다. 두 시간 동안 그녀와 통화하면서 왜 내 가슴이 더 절절해졌을까?
날씨 : 6도 / 수영장 다녀오다. / 내일은 멀리서 딸이 온다. 딸이 좋아하는 식혜를 만들려고 가루를 물에 담궈 놓았다. 딸은 ‘엄마의 된장찌개’ 하나면 끝이라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