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카 정미가 보내온 빨간 장미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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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빌려온 책 *『작가는 살아 있다』*를 읽으며, 현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김홍주, 김호득, 도윤희, 윤동천, 최정화, 황창배, 박이소, 안규철, 조덕현, 윤석남, 홍승혜, 신경희, 김주현, 윤영석, 김수자, 우순옥, 김보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작업은 대체로 크고, 설치적이며, 개념적이다.
그런데 이런 작품 앞에 서면 마음 한켠이 불편해진다.
‘이건 내게 너무 낯선 세계구나.’
그림이라기보다 개념의 구조물처럼 느껴질 때, 나는 잠시 소외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평면 회화에 익숙해 있던 내 눈에는, 이런 작품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진 화가야.”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품은 그림,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옛 화가들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령 보따리를 쌓아놓고 ‘작품’이라 부르거나, 철사 덩어리를 뭉쳐놓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전시물들, 혹은 책상 하나를 놓고 난해한 설명으로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는 장면을 볼 때, 나는 묘한 허무함을 느낀다.
이해보다는 설명이 먼저인 미술이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안다.
그들의 작품에는 각자의 ‘자기 편향’과 ‘자기 언어’가 있다.
그 편향이 단순히 ‘나만 좋다’로 끝나지 않고, 세상과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예술은 결국 대화의 다른 방식이니까.
이 밤, 나는 나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화가는 왜 그림을 그릴까?
화가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빛의 각도, 그림자의 리듬, 사물의 침묵 속에서 순간의 진실을 붙잡고 싶어서 붓을 든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의 끝에는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 그것은 나의 그림이 이세상과의 대화로 이어지기 위함이다. 화가와 관람자가 서로의 마음을 스치듯 이어지는 그 짧은 순간, 예술은 살아 숨 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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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흐리고 조금 선선해 졌다. / 새벽기도회 가 5시30분에 있었다. 큰 교회라서 그런지 약 60명 정도 모인것 같았다. 예배가 끝나고 바로 끓여낸 드립 커피를 마시며 과일, 토스트, 삶은 밤을 먹었다. 나는 캐나다에서 사온 퍼디스 쵸코렛을 한 통 가져가서 함께 나누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멀리 캐나다에서 온 쵸코렛입니다.” 아이고 모두들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었다. 아무튼 이 교회는 북적북적 먹고 마시고 예배도 엄첨 많이보고 사는 맛 나는 교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