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랍은 꽃과 뿌리에서 나온 추출물로,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quinine)*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그 외에도 해열제, 강장제, 위장약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옛날에는 아주 흔하게 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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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선생의 ‘금계랍과 어머니’글 중

사내로는 내가 막내였다. 늦게까지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젖에 금계랍을 바르셨다고 한다. 금계랍은 하루거리에서 먹는 키니네인데, 그 쓴맛을 본 후 나는 젖을 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에게는 금계랍의 맛일 것이다. 모태에서 태어나는 순간 탯줄을 끊어야 하듯, 어머니의 가슴에서도 언젠가는 떨어져야 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금계랍의 쓴맛을 맛보게 한다.


이 글에 유독 마음이 갔던 것은, 나 역시 이어령 선생과 똑같은 금계랍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칠 남매중 막내였고, 때는 내가 만 네 살쯤 되었을 때였다.

밖에서 뛰어놀다 배가 고팠던 나는 엄마를 찾아가 앞섶을 헤치고 젖을 찾았다. 허겁지겁 입에 젖을 머금을 즈음, 그날따라 젖의 맛이 너무 쓰고 이상해 깜짝 놀랐다.
“이잉~ 엄마야, 와 이리 쓰노?”
그러자 엄마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응, 아까 쥐가 와서 좀 먹고 갔다 아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쥐가 먹고 갔다는 젖을 다시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젖을 떼게 되었고, 그 놀라움과 충격이 너무 컸는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젖을 떼는 과정은 나나 이어령 선생이나 다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간식도 먹거리도 넉넉지 않던 시대였기에, 아기들은 배고플 때마다 엄마의 젖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어머니는 젖이 워낙 풍부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젖이 커서 힘들다”고 말씀 하셨다. 6.25 전쟁 후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젖이 늘 풍성했기에 내가 이렇게 키가 크고 건강하게 자랐던 모양이다.

금계랍의 쓴맛과 엄마 품의 따뜻함이 함께 있던 그 시간들은 슬프면서도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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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요즈음 이곳 낮 날씨는 그야말로 천상의 최고 기온이다. 온화하고 햇볕쨍~하다. / 언니와 함께 걷기하다. /